Job'Story/Doosan Supporters



이번 <두산인문극장 : 불신시대> 강연은

이번 선거철을 앞두고 있고,

최근에 세월호 사건으로

사람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해 있는

현 시점에서 열리게 된 만큼 강의 이전부터

어떤 강의일까 하는 호기심과,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의 질의응답도 기대를 하게 되었다.


Many forms of Government

have been tried,

and will be tried in this

world of sin and woe.

No one pretends that

democracy is perfect or all-wise.

Indeed, it has been said that

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from time to time.


Winston Churchill

(Hansard, November 11, 1947)


민주주의에 대해 찾아보다가

윈스턴 처칠이 언급했던 민주주의를 찾았다.

윈스턴 처칠은 지금까지 사람이 시도했던

어떤 정치 형태를 제외하고

민주주의는 최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우리는 그토록 최악이라고 평가받는

이 민주주의를 그토록 고집하는지에 대해

혹은 벗어나지 못하는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오늘 강연의 연사인 최장집 교수는

진보적 성향을 가진 정치학자이다.

몇년 전에 역사적 사실 왜곡에 관한 논란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가 쇠퇴하는 이유로

보수 정당의 독점체제를

원인으로 보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세월호의 그림자"


이번 강연의 부제로도 적합하지 않을까.

교수 본인도 이번 강연 원고를 준비하면서

세월호 사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하였다.


1. 한국 민주주의의 특성

2. 대표와 책임의 문제

3. 강력한 신자유주의 국가와 국가 능력

4. 시민 사회의 허약함 , 운동 결사의 자유

5. 자율적 결사체의 강화를 바탕으로한

다원적 민주주의


강연은 총 다섯개의 영역으로 나눠서

이야기하겠다고 하였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1. 한국 민주주의의 특성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형태를 띄고 있다.

민주주의는 아테네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는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로

시민이 스스로 통치하는 체제였고

시민이 돌아가면서 통치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통치자와 피치자의 역할을 돌아가면서 하며

순환적인 구조를 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시민이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여 대표에게 통치를 위임한다.


통치를 대행하는 에이전트가 있는 것이

고대 민주주의와의 차이이다.


대리인을 선출해서 통치하도록 하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이로인해 더 복잡해졌고,

3자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2자 관계에서 3자 관계로 바뀌면서

복잡한 문제를 불러왔다고 한다.


통치자는 자기 맘대로 통치하는 것이 아닌

시민들이 기대하는 것에 따라

책임을 수반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치자를 선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선출되지 않은 공직자가 있기 때문이고

통치자에게만 책임을 부담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직자에게도 책임을 부담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통치자를 선출한 순간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직자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것도

지속적으로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나라는 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얻어서

민주주의에 대해 기대가 크고

운동이라고 하면, 

기존에 있던 군사 독재체제를 물러나게 했기 때문에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것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독일의 민주주의는

사실 별반 차이는 없다.

다만 정당이나 몇몇 정치 중요 요직들의

권력 차이밖에 없다고 교수는 말하였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운동으로 얻었지만,

정부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은

실질적으로 민주주의 일수가 없다고 한다.


특히 한국에서 인식하는 민주주의는

타 국가에서 인식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민주주의는 이념이지 정치 체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이념이라고 하면 매우 이상적이다.

정치 체제라는 것이 의미가 무색해진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것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기 마련인데,


민주주의를 잘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사안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운동권 진보적인 세력들은 이념은 강하지만,

정작 통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부족함이 많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나가는데

약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교수는 말한다.


결국 빈 수례다.

진보 성향의 야당은 결국 빈 수례다.

내가 앞서 다른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말만 번지르르한 빈 수례.


우리나라의 주류 정당중에

야당이 민주주의를 발전하게 못하고 있다고 교수는 말했다.

보수 정당이 더 정당으로서의 발전은 잘했다고 말했다.


야당이 야당으로서 역할을 해야할 시점에

야당이 못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모습.

여당과 야당이 타협과 협조 경쟁 등

건강한 관계여야 하는데

정당 체제가 좋아야 좋은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데

한 정당이 약화되면

불균형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악순환으로 초래한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2. 대표와 책임의 문제


교수는 선출되지 않은 공직자가

핵심적인 문제라고 꼽았다.

그 이유는 관료 행정기구는 사회가 발전하고 

기능적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인데,

자율성을 갖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지만,

그 자율성이 남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통치자가 관료들을 통제하고

책임을 부담시키는 것은

정치를 아주 잘하지 않고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임명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을 지적했다.

단계를 건너갈 때마다

책임을 부담시킨다는 것이 갈수록 느슨해진다고 했다.


책임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이다.


고대 민주주의에서는 책임을 지는 방식에 대해

사형과도 같은 방식으로 강하게 만들어져있었으나

현재의 민주주의는 매우 약하게 되어있다고 했다.


우리 나라 헌법의 삼권 분립은

책임을 물리는 제도이자,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를 수평적 책임성이라고 정치학에서 정의한다.

하지만, 사법부와 입법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행정부가 군림한다면 민주주의는 삐걱댈 수 밖에 없다.


수직성 책임성은 위에서 아래로.

즉, 시민들이 공직자들에게

책임을 물리는 것이라고 한다.

수직성 책임성은 즉 '선거'이다.


시민들이 결사체로 나타나

권력을 항상 감시해야

수직성 책임성이 잘 작동될 수 있다.


수평적 책임성과 수직성 책임성의 두드러지는 차이는

수평적 책임성은 사건 이후에 견제하는 것이며,

수직성 책임성은 사건 이전에 견제하는 것.


국가기구가 민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메카니즘은 이 두개의 요소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3. 강력한 신자유주의적 국가와 국가 능력


많은 일들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관료 체제는 합리화의 메카니즘에

종속된 조직이라고 하였다.

관료화 = 민주화의 결과

민주화는 많은 요구들이

시민 개개인들과 사회 집단으로부터 나오게 되고

그러한 요구들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관료체제는 팽창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민주화는 관료화를 동반한다.

관료는 시민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공적 권력이 넓어지는 것인데

그것 없이는 또 일이 처리될수 없다.

민주주의의 파라독스라고 할 수 있겠다.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또 다른 부담.


민주주의는 확장되는데,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관료화도 확장.


전통적인 관료제가 평창하고

신 자유주의적인 이념이

공직자들의 행동규범으로 수용되는 현상.


우리나라의 관료주의는 과거 군부적인 모습에서

한국 경제의 견인차로서 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입혀지면서

'민영화' 라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

공적 임무가 민간 기업체로 이양되면서

상당히 복잡해진 모습이 되었다.


공직자들의 지대추구 행위를 가져오게 되었다.

사적 영역에 공적 행위들을 하는

역할의 요소들을 심어놓고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거래 행위가 많아지며

불법의 공간이 생성되었다.


관료 공직 사회의 변화는

과거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국가의 공익을 위해 일한다는 인식이었다면,

오늘날은 공직 윤리가 허물어져

공익 보다 사익을 추구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결국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퇴보하는 양상이 되어버렸다.


이번 세월호 사건은 무엇때문인가라는

이유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라고

교수는 말했다.


인간 가치를 옆으로 두고

성장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하다보니

이러한 부작용이 바로 세월호 사건이다.


세월호 문제는 우리 사회의 문제가 집약되어 있다.


성장하는데만 급급해서 만들어왔던

어두운 면모들이 농축되어 있는 것이 세월호 사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이 무너졌음을

이 사건을 통해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강력한 신 자유주의국가가 만들어낸

부정적인 사례가 되었다.


강력한 신 자유주의 국가

민간 기업체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가

구조에 가담하는 것이 이례적으로 볼 수 있는 것도

공적 기능을 민간으로 이양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결국 해경을 무능하게 만든 것은 우리다.


해양 구조 협회와 같은 성격이 애매한 기구는

해양수산부와 해경의 고위 공직자

그리고 민간 기업들의 대표들의 양로원과 같은 기구는

법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민간 기업과 해경과 해수부의

중간기구는 소통을 방해하고

편법과 비리 부패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고 했다.


해경이라는 정부기구 자체가

국가 예산을 많이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해경 본연의 목적에는 예산을 사용안하는.


제 기능을 못하는 기구가 되어버린 것도

해경 책임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한국 선급'

배들의 안전을 관리 감독을 해야 할 애매한 기구가

역할을 안한 것도 공적 기능이

민간 기구로 이양되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원래의 정부 기관과 민간 기구들의 친목회와 같은

있으나 마나한 정부 예산을 받는 기구들이 문제인 것이라고

교수는 꼬집었다.


실질적으로 이번 세월호 사건을 통해

해난 구조는 뒷전이고

모두 다 돈이 얽혀있는

이런 구조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변화를 위해

오히려 터닝포인트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바램이다.


이번 사건의 최전선에 있는 인물들을

도덕적으로 질타할 수 없는 것은

고용불안정과 임시직이기 때문에라고 교수는 말했다.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지 않았고,

도덕적 파탄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오는 것이라고 교수는 말했다.


4. 시민 사회의 허약함과 운동 결사의 자유


한국 시민 사회는 강한가?

교수는 매우 약하다고 보고 있다.


시민 사회 이론에서는 강력한 국가와

강력한 시민사회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한다.

한국은 학자들이 민주화 된 이후 분석했던 것은

강력한 국가와 전투적인 시민 사회라고 했다.

상당히 이례적이고 희안한 사례라고

그때 당시 분석했었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건강한 것이다.

그러나 교수는 그저 운동이 너무 강하다보니 이미지에 불과했고,

실상은 약한 시민 사회라고 교수는 말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시민 사회를

대표했던 것은 운동이 대표했는데,

운동이 대표했기 때문에

시민 사회를 강력하다고 봤지만,

민주화를 쟁취한 이후에는

시민 사회의 모습이 약하게 되고

국가는 강하게 되었다.


시민 사회라고 하는 것은

외국에는 자율적 결사체가 중추적인 기반이 된다.

그것이 일반적인 이론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자율적 결사체가 제대로 조직되지 않고,

우리나라는 결사의 자유가 매우 약하다.

강한 경제 집단은 결사의 자유가 지나치게 풍부하나

사회 약자들에게는 결사의 자유가 제한된다.


이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자율적 결사체가 전체적으로 약하게 될 수 밖에 없고

키보드 워리어 밖에 양산안하는 것.


자율적 결사체가 약한 상태에서

운동이 이를 대체했다.

선진 국가에서는 이러한 강한 결사체에 기초해서

정당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정당의 하부 조직체로서의 결사체라는

한국은 상당히 반대의 모습이다.


메디슨 민주주의가 미국 연방 정부의

헌법을 디자인할 때

특정의 사회집단이 정치를 독점할 수 있도록

대통령 권력이 굉장히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고 말하였다.


한국의 대통령은 제도적으로 강하다.

헌법이 부여하는 대통령의 권한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때 굉장히 강하다.

정치적으로 허약한 대통령이라도

민주화 이후 모든 대통령이 경험했다.

다만 임기 중반에까지만 그러하고,

임기 말에는 허약하게 바뀐다.


자율적 결사체의 약화는

수직적 책임성을 약화시킨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

선장이나 선원들의 권익을 보호해줄 결사체의 부재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대상의 부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결사체는 문제의 당사자들이 스스로 조직하는 것이나

한국에서는 이런 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교수는 말했다.


고용주와 피고용주, 복종,

결국 군사 독재체제로부터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볼 수 있을까?


현재 우리나라에서 결사체가 없이

시행되고 있는 수많은 시위들은

그저 정치적 불만만 늘어날 뿐,

문제 해결은 안되고 있다고 했다.


우리 나라 정책 결정 과정에서

약한 사회 계층

아무리 대표자리에 오르더라도

힘이 없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실상이라고 교수는 말했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우리는 오늘날 많은 민주주의의 노력을

'집단 이기주의'라는 표현으로 몰아갈 뿐은 아닌지.


민주주의를 위한 'COST'는 지불하고자 하지 않고

'꽁'으로 먹으려는게 우리의 모습이지는 않을까?


여담이지만,

진보 보수 편가르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빈 수례를 싫어한다.

두산인문극장에서 열린 많은 강연들은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이야기와 연사들을 초청한다.

물론 그에서 배울 것도 있고,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수도 있게 되지만.



2014년 5월 19일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에서

두번째 영화 상영이 있어 다녀왔다.



이번 영화는 2012년에 제작된 영화로

소피 파인즈가 감독을 맡아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라는 제목으로

2006년 제작된 <지젝의 기묘한 영화 강의>에 이은

지젝과의 두번째 프로젝트이다.


지젝은 누구인가?



지젝은 유고슬라비아 출생으로

헤겔, 마르크스, 자크 라캉 정신분석학에

기반한 비판이론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한 무신론자이다.

이점을 언급하는 것은

내가 지젝을 바라볼 때

선글라스를 끼고 바라볼 것이라는 것을

앞서 말하고자 한다.


두산인문극장의 대다수의 강연이

LEFTIST 방향으로 많이 치우쳐서 있다보니

들으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다.


두산인문극장에 찾아오는 대다수의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은 현재 국가의 상황에 대한 반응을

자발적이고도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계층이다.


LEFTIST의 극단적인 좌/우에 대한 방향감각은

나를 좀 어렵게 한다.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은

그 반대를 지지하는 것 처럼 몰아간다고 해야하나.


사실 요란한 빈 수례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지젝이 등장한 이 영화는 그래도 신선한 자극과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빈 수례는 신선하지도 않고

생각하기도 귀찮다.



영화의 시작은

1988년 제작된

<THEY LIVE>의 한 장면으로 시작했다.



주인공인 존 나다(나다는 스페인어로 Nothing)이

버려진 집에서 선글라스로 가득한 상자를 발견한다.


선글라스는 진실을 바라보게 한다.


사회의 광고 속에 내제되어 있는 메시지와

사람들의 실체를 주인공에게 보여준다.


OBEY


돈에는 THIS IS YOUR GOD


영화 속 주인공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선글라스를 쓰던지,

아니면 저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꺼내 먹던지.


지젝은 여기서 우리가 이미

쓰레기통에서 먹고 있다고 한다.

그 쓰레기통의 이름은 '이데올로기'라고.

 

지젝은 사회의 이 모습을

Dictatorship in Democracy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데올로기는 우리 자신에게만 투영되는 것이 아닌

사회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말했다.


영화의 주인공이 친구에게 선글라스를 쓰라고 하지만

친구는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난투극이 벌어진다.


현실을 알아버린 사람과

자신이 현실이라 믿고 있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벗어나기 싫은 사람


지젝은 Freedom Hurts라고 말한다.


스파이더맨에서 명대사가 있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이것을 바꿔본다면


With great freedom comes

great responsibility.

책임이라는 단어는 내게 매우 두려운 단어다.

이미 현실을 알아버린 나는

모든게 너무 아프다.

그래서 디스토피아 세상을 원한다.

그게 덜 아플 것 같으니까.



다음 영화는 1965년에 제작된

<SOUND OF MUSIC>이다.


지젝은 심리분석학의 기본 인식은

즐거움과 단순 쾌락을 구분짓는다고 하였다.

즐거움과 단순 쾌락을 구분짓는 큰 차이는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의 대표적 사례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발생하는 순간이라고 하였다.


영화 <SOUND OF MUSIC>의

주인공은 수녀이지만,

너무 활발하고 성적인 매력이 가득한 주인공이다.

그 성격 때문에 주인공은

한 가정에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남작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대모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고

대모가 주인공에게 노래하는 이 장면이

지젝에게는 매우 신기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Climb Every Mountain


 돌아가서 그 남자를 유혹하고

너의 길을 가고 너의 감정을 속이지 말아라


이러한 내용이 주된 내용인

이 노래의 깊은 뜻은


성스럽고 높은 분이 너를 굽어보시니

가서 맘대로 하고 즐기라라는

메시지를 숨기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발칙한 사상은

기독교의 사상이 아닌

교육 기관으로서의 카톨릭 사상이라고 지젝은 말했다.


우리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척 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지젝은 이것을 카톨릭 교계 사상의 정수이자

이데올로기의 순 기능이라고 말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낀다.

과도한 즐거움을 취해서가 아니라

즐기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즐거움이 의무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지젝이 이번엔 사막 한가운데에 있다.

그는 여기서 코카콜라의 모순을 논한다.

"Coca-cola is the real thing."


그 'THING'이 무엇인가.


실체가 없는 무언가를 준다고 한다.


코카콜라의 모순은 이뿐만이 아니다.

코카콜라는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갈증을 불러온다.


특히 사막 한가운데에 있으니,

코카콜라는 미지근할 것이고,

지젝은 더 이상 코카콜라는

'Real thing'이 아니라 한다.



지젝은 이제 

교묘한 잉여물, Elusive surplus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Kinder Egg Surprise를 놓고 이야기한다.

이 상품은 사람의 욕구를 실체화 시킨 것이라고 한다.


초콜릿과

안에 있는 장난감, 즉 SURPLUS.


초콜릿을 즐기려면,

안에 있는 SURPLUS에 만족해야 한다.


잉여물에 불구한 것에도.



지젝은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베토벤이 작곡한 '환희의 송가'를 언급한다.


정치적으로 많이 사용되었고,

실제 독일에서도 히틀러 승전을 알릴 때 사용되었고,


독일이 과거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서 있을 당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은 후,

동독과 서독의 국가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

'환희의 송가'가 울러퍼졌다.


과거 중국에서도 서양의 문물은 배척되어도

이 음악만큼은 허용되어 널리 퍼졌다.


이 음악은

EU의 비공식적으로 상징 음악이다.


음악도 문화의 일부분이다.

문화를 통해 전혀 섞이지 못할 것 같은 양 극단이

섞이는 모습을 본다.


지젝은 이것을

"오사마 빈라덴과 부시 대통령과 포옹하는 것"

이러한 상상을 해볼 것을 말하였다.


결국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실질적 '중립'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 같다.


영화를 통해서 말하는 지젝을 보면서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보는 영화 속에

너무나도 많은 내용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받았다.


이번 영화는 1971년에 제작된

<CLOCKWORK ORANGE>다.


이 영화는 매우 기괴하다.

주인공인 알렉스는 등장하는 남자들과는 매우 다르다.

 


그는 '환희의 송가'에 엄청난 존경심을 보인다.

그리고 그 음악은 그에게 편안함을 안겨준다.


'환희의 송가'는 어떤 음악이기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듣고 부르는가.


지젝은 이렇게 말했다.


베토벤은 그의 음악에

자신의 사상을 녹여냈다.

그리고 그 사상을 비판하고 있었다.

음악의 첫장과 뒷장에 이어지는 악장들을 보면

첫장에서 표현된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는 것을 들을 수 있다고.



뮤지컬로도 많이 만들어진

<WEST SIDE STORY>에서

역설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표현된다.



Dear kindly Sergeant Krupke, 
You gotta understand, 
It's just our bringin' up-ke 
That gets us out of hand. 
Our mothers all are junkies, 
Our fathers all are drunks. 
Golly Moses, natcherly we're punks! 

ACTION AND JETS 
Gee, Officer Krupke, we're very upset; 
We never had the love that ev'ry child oughta get. 
We ain't no delinquents, 
We're misunderstood. 
Deep down inside us there is good! 

ACTION 
There is good! 

ALL 
There is good, there is good, 
There is untapped good! 
Like inside, the worst of us is good! 

SNOWBOY: (Spoken) That's a touchin' good story. 

ACTION: (Spoken) Lemme tell it to the world! 

SNOWBOY: Just tell it to the judge. 

ACTION 
Dear kindly Judge, your Honor, 
My parents treat me rough. 
With all their marijuana, 
They won't give me a puff. 
They didn't wanna have me, 
But somehow I was had. 
Leapin' lizards! That's why I'm so bad! 

DIESEL: (As Judge) Right! 

Officer Krupke, you're really a square; 
This boy don't need a judge,

he needs an analyst's care! 
It's just his neurosis that oughta be curbed. 
He's psychologic'ly disturbed! 

ACTION 
I'm disturbed! 

JETS 
We're disturbed, we're disturbed, 
We're the most disturbed, 
Like we're psychologic'ly disturbed. 

DIESEL: (Spoken, as Judge)

In the opinion on this court,

this child is depraved on account

he ain't had a normal home. 

ACTION: (Spoken) Hey, I'm depraved on account

I'm deprived. 

DIESEL: So take him to a headshrinker. 

ACTION (Sings) 
My father is a bastard, 
My ma's an S.O.B. 
My grandpa's always plastered, 
My grandma pushes tea. 
My sister wears a mustache, 
My brother wears a dress. 
Goodness gracious, that's why I'm a mess! 

A-RAB: (As Psychiatrist) Yes! 
Officer Krupke, you're really a slob. 
This boy don't need a doctor,

just a good honest job. 
Society's played him a terrible trick, 
And sociologic'ly he's sick! 

ACTION 
I am sick! 

ALL 
We are sick, we are sick, 
We are sick, sick, sick, 
Like we're sociologically sick! 

A-RAB: In my opinion,

this child don't need to have his head shrunk at all.

Juvenile delinquency is purely a social disease! 

ACTION: Hey, I got a social disease! 

A-RAB: So take him to a social worker! 

ACTION 
Dear kindly social worker, 
They say go earn a buck. 
Like be a soda jerker, 
Which means like be a schumck. 
It's not I'm anti-social, 
I'm only anti-work. 
Gloryosky! That's why I'm a jerk! 

BABY JOHN: (As Female Social Worker) 
Eek! 
Officer Krupke, you've done it again. 
This boy don't need a job,

he needs a year in the pen. 
It ain't just a question of misunderstood; 
Deep down inside him, he's no good! 

ACTION 
I'm no good! 

ALL 
We're no good, we're no good! 
We're no earthly good, 
Like the best of us is no damn good! 

DIESEL (As Judge) 
The trouble is he's crazy. 

A-RAB (As Psychiatrist) 
The trouble is he drinks. 

BABY JOHN (As Female Social Worker) 
The trouble is he's lazy. 

DIESEL 
The trouble is he stinks. 

A-RAB 
The trouble is he's growing. 

BABY JOHN 
The trouble is he's grown. 

ALL 
Krupke, we got troubles of our own! 

Gee, Officer Krupke, 
We're down on our knees, 
'Cause no one wants a fellow

with a social disease. 
Gee, Officer Krupke, 
What are we to do? 
Gee, Officer Krupke, 
Krup you!


<WEST SIDE STORY>의 이 음악에서

잘 나와있듯, 이 문제아들의 자신들의 문제가 뭔지 알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도 안다.

다만 알고 있는데도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 모순이다.

지젝은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냉소적인 면모라고 한다.


이러한 문제아들도 작은 꿈이 있다고 한다.

그 꿈은 보편적인 것일 수도.



지젝은 2011년 영국 폭동을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폭행하고 기물을 파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물건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가져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붕괴되었을 때,

남아있는 것은 순수한 소유욕 뿐이라고 말했다.

이 폭력의 현장들 처럼.



1976년 제작된 <TAXI DRIVER>은

이 폭력의 잔혹성을

아주 극단적인 자살로 표현했다고 한다.


주인공은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 판타지는 그의 은밀한 쾌락이며,

지젝은 판타지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근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무언가에 답을 낼 수 없을 때,

판타지는 그것에 대한 답을 제공해줄 수 있고,

다른사람들이 나를 '원한다'라는 판타지에 사로잡힌다.



그 판타지가 깨지는 순간의 결과는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최근에 있던 총격 난사 사건의 범인이

사전에 남긴 예고 영상이 그의 환상이 깨어졌을 때

그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나타났음을.



1956년 제작된 <THE SEARCHERS>라는 영화는

<TAXI DRIVER>이라는 영화의

기본이 되는 영화라고 지젝은 말한다. 


<TAXI DRIVER>와 <THE SEARCHERS>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기는 한 여인을

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구제자로서는 자신이 되야한다고 생각한다.


<THE SEARCHERS>에서는 한 백인 여인이

인디언 추장에게 납치되어

그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고,

<TAXI DRIVER>에서는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인이

나쁜 포주로부터 착취당하고 있다.


주인공은 자신이 피해자라 인식한 사람을

구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자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 고통받음을 즐기고 있다.


여기서 지젝은 이라크를 언급하면서,

과연 그들을 돕는 것이 옳은 것인지 물었다.

그들로서는 지금까지 살던 삶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미 순응하며 살고 있었는데,

우리가 그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이

옳은 것인지 묻고 있었다.



<TAXI DRIVER>의 끝에는 역시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 또한 죽는다.


폭력은 주변 상황을 올바르게 인지하지 못할 때

그것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된다고 지젝은 언급했다.



1975년에 제작된 <JAWS>다.

이 영화에서 상어는 다양한 상징성을 지닌다.

사람을 공격하는 상어는 미국에 오는

외국인들을 상징한다고 했고,

누구는 자연재해를 상징한다고 했다.

또한 누구는 피델 카스트로가 이 영화를 좋아했고,

좌파 성향의 영화라고도 하였다.

그는 상어는 자본을 가지고

폭력성을 행하는 미국이라고도 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자연재해부터 자본을 흔들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두를.


이데올로기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인간역사에서 나치와 파시즘 등

모두 동일하게 두려움을 사용했다고 한다.



1935년 제작된 <TRIUMPH OF THE WILL>


파시스트의 궁극적인 목표는

차지하고 정복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파시스트는 자본주의와는 상반되기 때문에,

대립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어,

사회가 잘못되가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외세의 침략때문이라고 설명해야 한다.


여기서 독일의 경우

유대인들에게 그 화살이 향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필터와 같아서(프레임)

똑같은 현실을 보더라도 모든 것이 바뀐다.

프레임이 무언가를 더하지는 않지만,

그 프레임을 통해 보는 것은 바뀐다.



1940년에 제작된

<THE ETERNAL JEW>라는 영화다.

유대인들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다.



1972년의 영화 <CABARET>에서

등장하는 노래이다.

나치 완장을 차고 노래하는

이 장면에서 불린 이 노래는

실질적으로는 유대인이만든

노래인 것이 아이러니하다.


혁명적이기도 하고 매우 좌향의 성격으로

불리우고 있다.



독일의 유명한 락밴드 RAMMSTEIN의

REISE REISE라는 곡은

나치 사상이 미니멀하게 표현되고 있다.

지젝은 나치 사상과 대적하는 방법은

이 요소를 아무리 괴상하다 하여도

즐기는 것이라 하였다.

그럼으로서 내부로부터 나치가 자연스레

붕괴하게 하는 것이라 했다.




지젝은

소비지상주의 (Consumerism)을 언급하면서,

스타벅스 커피의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우리가 단순히 커피를 사는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도 함께 사는 것이라고.

예전에는 소비자가 소비를 하면서

환경 혹은 제3국가에 대한 죄책감을 부담해야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회사가 소비자에게 그 죄책감을 주지 않고,

사회에 대한 의무를 대신하기 까지 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자본의 순환을 요구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것을 요구한다.

의무, 자본주의의 환경속에서 의무는

이상한 종교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본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순환되어야 한다라는 관념 속에 있다.



지젝은 영화 <TITANIC>에서

로즈와 잭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말한다.

설령 살았다고 해도 금방 끝날 관계 였다고.

상류 계급의 로즈는 바닥까지 떨어

 자신의 자아를 올려줄 계기가 필요했고

신분 상 바닥인 잭과의 관계를 통해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고.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로즈는 계속해서

"I will never let go"를 말한다.

하지만 잭을 놓아준다.


헐리우드에서 다양한 이야기 소재에서

항상 이것과 유사한 흐름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젝은 두개의 영화를 이야기 하면서

군대에서 무언의 규칙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사회에서 무언의 규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이야기 한다.




이처럼 그 규칙이

그 무언의 행동강령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영역까지도 침범을 한다.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를 보면서

가장 집중해서 본 부분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부분은 집중 안한 것은 아니지만,

지젝이 무슨 이유에서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서였다.


지젝은 끝에

무신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알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기독교가 무신론을 입증하기에

적합하다고 한다.

지젝이 설명하는데 있어

Somehow, whatever이런 식의 표현은

그도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보니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후에

지젝은 한개의 영상을 남긴다.


집에 돌아와 다시 보면서 정리한 것이라

더 뒤죽박죽

그때 처음 봤을 때의 Radical한 감정보다

살짝 수그러들긴 했다.


상당히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차이도 있고

견해가 다른터라

이 영화는 홀로 보기보다는

여럿과 보고 생각을 나눠보기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권해보고 싶은 영화다.





5월 11일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의 전시회

"숨을 참는 법" 관람을 다녀왔다.


총 3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관람은 5월 3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두산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화요일~금요일 : 10시 30분~20:00시 까지.

주말 및 공휴일 : 10시 30분~19:00시 까지.

(월요일 휴관)


매주 수요일 19:10 큐레이터 전시 설명


이 전시회는 "불신시대"를 전시회를 통해

사회 속에서의 획일화되며 서서히 소멸되어 가는

개인의 모습을 담았다고 한다.



구동희 작가의 "부목"


나무가 호흡하기 위해 각기 다른 곳으로

연결되어 있는 파이프 없이는 못 사는 곳.



구동희 작가의 "부목"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찍은 것,

관찰자적 시선을 표현.



양정욱 작가의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


나무 파편들이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소리를 만들어내는 조형물은

벽에 비친 그림자의 환영과 더불어

지친 일상에 소진되고 파묻혀 있는

현대 사회 속 개인의 평범한 삶 투영.



배경음악이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가서 직접 보면 상당히 기괴하다.

피아노 소리가 아니라 딱딱 거리는

소리가 계속 울린다.


우리

기괴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걸지도 몰라.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의

두번째 연극, 엔론을 보러 다녀왔다.



5월 11일 일요일 3시 공연으로

<관객과의 대화>까지 할 수 있어서

신청하게 되었다.



미국 지폐에 온갖 낙서들이 가득한 이것이

연극 ENRON의 브로셔다.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뒷면.



마치 신문지의 1면처럼,

그리고 누군가가 신문을 읽으며

하이라이트 해놓은 것 처럼

중요 정보를 별도로 표시해놓은 것이

디자인을 매우 잘 했다고 생각했다.

특히 8컷 만화로 연극의 장면을 표현한 것도.



ENRON은 단순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연극이었다.

그때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이 이로인해

경제적 손실을 입었고,

미국에서도 이처럼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었고,

ENRON의 CEO와 관련된 사람들은 수감되어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2001년 말에 엔론이 보고한 재정상태가 

제도적, 조직적, 체계적, 창의적으로 계획된 

회계부정(분식회계)으로 지탱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엔론이 파산하자 엔론의 경영진은 물론 

회계법인, 법무법인 등을 상대로 한 

민,형사 소송이 봇물을 이루었다. 

엔론의 회계를 맡았던 아더 앤더슨은

 엔론이 파산하기 훨씬 전부터

 엔론의 회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묵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엔론은 2002년 1월 17일 아더 앤더슨과의

회계용역계약을 해지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엔론의 회장이었던

케네스 레이 회장과 최고경영자였던 제프리 스킬링은

연방법원에서 사기와 내부자 거래 등으로

각각 징역 24년 4개월, 24년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엔론의 외부 감사를 맡고 있던

미국의 5대 빅펌(회계법인) 중 하나였던

아서 앤더슨(Arthur Andersen) 역시

이 사건으로 인해 영업 정지를 당하고

 결국 파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엔론은

기업 사기와 부패의 유명한 상징이 되었다.

(위키피디아 발췌)



(사진출처 : 플레이DB)


배우들 하나하나가 모두 개성도 뚜렷하고

보는 내내 즐거웠던 작품이었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화려하고 무엇보다 넓은 무대가 돋보였다.

막 전환을 최소화하고 

뒷 배경에 스크린으로 여러 장소를 표현하며

화려한 연극이었다.


연극 처럼 보이지만,

뮤지컬 처럼 배우들이 단체로 춤을 추고

사태가 심각할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을 재미있고 재치있게

풀어냈다.


연극 시작할 때,

극장을 가득 채우던 WHY라는 목소리.

아마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

질문을 던져보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배우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려고 노력했고

서로에게 반응하려고 했다.

다만 조금 부족한 느낌.

뷰포인트로 하려는 것은 알겠으나,

잘 안된듯.

공연 전공하면 눈만 높아지는 것 같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언빌리 '버블'

명대사가 아닐까 싶다.

거품.

거품 밖에는.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엄청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음악과 춤으로 가볍게 풀이했다.

만약 이렇지 않았다면, 

엄청 침체된 분위기의 연극이었으리라 생각.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제프리 스킬링역을 맡은 배우는 정말 잘했다.

135분의 러닝타임 동안 흐트러짐 없이

거의 등퇴장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무대 위에 있었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랩터.

랩터의 상징을 생각해보며

극을 봐도 큰 재미로 와닿는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제프리 스킬링,

남자는 역시 수트.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다른 미국의 기업들을 저와 같이

퍼펫으로 표현했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정말 연기 잘했다.

처음과 끝.

계속해서 변하는 역할이었고,

그 변화가 느껴져서 좋았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연극은 전반적으로 흥미로웠다.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을

춤과 음악으로 재미있게 풀이했고,

다만 앙상블이 잘 만들어지지 않고

뷰포인트가 잘 안되서 그 점이 아쉬웠다.


그래도 작품 자체만으로도

단점들을 충분히 극복하고

주연들의 멋들어진 연기를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연극 초반에 극으로 들어가기 전

인트로 같은 대사를 끝으로

이 연극을 추천한다.


저는 변호사입니다.

세상이 어려울 때 돈을 버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죠.

회사가 망한다거나 실업률이 올라간다거나 

결혼이 파경을 맞는다거나

사람들이 자살로 내몰린다던가.


누군가가 나눠야하지 않겠습니까? 돈을?


이럴 때 우리는 실로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요. 

여러분들께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설명해드릴 수 있지만

저에게는 시간이 없고 

여러분에게는 돈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가끔 누군가가 튀어나와 

그런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오면 다들 위대한 사람을 찾아내 

그를 우러러 보면서 상황을 바꿔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사람 안에는 

잠재된 위험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께서 보게될 세상을 바꾸려고 시도 했던

어떤 사람은 20세기말을 뒤흔들고 

이번 세계에도 그림자를 던진 

기업 범죄의 배후에 있던 사람입니다.


모든게 사실이지만, 모든게 사실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마치 모두가 사실인냥 포장해서 보여드릴 것입니다.

뭐 사실 크게 다르지도 않습니다.


준비되셨습니까.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의 두번째 주제,

"우리는 지속할 수 있는가"

첫번째 강연인 

<아파트 게임과 중산층의 삶>이라는 주제로

박해천 교수의 강의가 

4월 28일 19시 30분 두산아트센터에서 있었다.



박해천교수는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이며

'디자인 연구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번 강의를 통해 디자이너가 바라보는

'부동산'에 대한 관점을 공유해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하고 새롭다는 생각을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디자이너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제까지 내가 바라보던 세상과는 달라서

흥미로웠다.

 

박해천교수는 유독 '아파트'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다양한 책도 냈다고 했다.



그중에 이번 강연 주제에 포함되어있는

'아파트 게임'에 대한 저서가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찾아보아도 좋을 것 같다.



매번 강의 때마다 1층에 앉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2층에 앉았다.

이때까지 내가 왜 1층에 앉았나 싶을 정도로

2층은 정말 편했다.

 

2층 맨 앞자리에 한정적이긴 하지만,

책상처럼 쓰기에는 딱이라

앞으로도 계속 2층으로 가기로.



중산층이라고 불리우는 계층.

중산층은 연소득 7000만원 이상일 경우라고 

교수는 말했다.

하지만,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말을 하나

소득은 중산층의 소득이 아닌 괴리감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조선일보 <인생 10계단>

박해천 교수는 갈수록 

마이너스 통장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소설가 박민규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단편소설을 인용하였다.

책 내용에서 아버지는 산수를 했고 

아들은 수학을 찾아 떠나는 모습이 나온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는 삶의 반복 

그 속에서 아득함을 느낀 생활인이라면 

누구나 '수학 정도가 필요한 인생'을 

꿈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산수 = 근로 소득

수학 = 자본 소득

 

산수는 근로 소득.

수학은 자본 소득을 상징한다고.



우리나라는 10년을 주기로

큰 변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세대별로 생긴

해프닝이 지금의 한국을 만들었다고.

 

4.19 세대

유신 세대

386 세대

.

.

.

 

그때는 10% 이상의 경제 성장과 함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지만,

지금은 경제성장률이 미미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

 

그때 당시에는 아파트를 분양을 받고

아파트가 2년 후에는 집값이 올라

더 큰 평수의 아파트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아파트가 주거 공간이 아닌

즉 수학.

아파트 게임이 한정된 재화를 통해 

빠른 성장이 일어난 것이다. 

 

옛날에는

중동 건설을 갔다오고

정관 수술을 받은 사람

청약 1순위.

 

우리 아빠 이야기잖아.



나는 비록 40대지만 부인만큼은 20대여야 한다.

1960년대 오비맥주 광고를 통해 

엿보는 그때 당시 시대상.



과거 살던 집은 이런 유형의 집이었다.

마당이 있고, 나무도 있고, 



하지만 시멘트, 플라스틱에 익숙하지 않던 세대가

아파트에 들어가면서 베란다에 정원을 꾸미고,

그때 당시 그린 인테리어가 부동의 1위 트랜드 였다고.



이것 말고도 

내가 어릴적 기억하는 차는 포니, 르망 등등.

정말 많았는데.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IMF 이전,

아파트 재건축 및 거래에 참여를 했던 것은 

정부, 건설회사, 개인

 

IMF이후에는 정부가 빠지고

은행이 참여하게 되었다고.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이날 속이 안좋아서 계속 화장실 들락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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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몇가지를 꼽자면,


1. 88만원 세대 그리고 그 이후. 중산층의 껍데기밖에 안될 것.


2. 갈수록 새집이 만들어지는게 둔화될 것. 


3. 한국의 경제 격변 이전에 항상 나라에 큰 일이 있었다.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등등. 어쩌민 이번 세월호 침몰이 전초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4. 한국의 교회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끼고 성장한다. 여의도 순복음 아파트, 과연 말 실수 였을까. 


5. 우리나라의 중요한 의사 결정은 2곳에서 이뤄진다. 강남의 대형교회와 강남의 룸살롱이다.


6. 내수 시장은 너희를 걱정하지 않는다.


왜 너희가 걱정하는지.
준비를 해라.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

 

별도로 참가 신청도 해야하고,

 

나 같은 경우에는 거리도 멀어서 더더욱.

 

하지만 기자단 활동은 열심히 ^^;;

 

두산아트센터에 꼭 가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강연 녹음된 것을 들어볼 수 있다.

 

PC용 링크 : http://www.podbbang.com/ch/7508

 

Mobile용 링크 : http://m.podbbang.com/ch/7508



이번에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에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의 마지막 강의로

서동진 교수의 

<사랑에 관한 질문들>이라는 강의가 진행되었다.

 

이날 전공 교수님의 부친상으로

참여할 수가 없었지만, 

뒤늦게 녹음된 것으로 들어보고 정리해볼 수 있었다.


<사진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8573>

 

강연 녹화를 들으면서 실제 강연 사진보다 

이 기사에서 나타난 사진이 이 사람을 표현하고 

느껴지는 그대로 나타냈다고 생각해서 

제일 처음으로 올리게 되었다.

딱딱한 강의자리가 아닌 

술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해야 될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교수이다.

 

그리고 강의에서 느껴지는 것은

진보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공격적인 진보는 아니었다는 생각.

 

그렇다고 해서 마냥 편한 강의 내용도 아니었다.

 

혁명 그리고 사랑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Les Miserables

생각이 많이 났다.



서동진 교수는 '사랑'이라는 주제는

이렇게 많은 청중들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닌

3~4명과 함께 은밀한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을 매우 신성하게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어쩔 수 없이 믿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 내밀하게 이미 믿고 있으면서도,

또 더 이상 믿을 가치가 없다고 

체념적으로 부인하는 것.

 

그가 정의하는 사랑은 위와 같았다.

불신의 대상임과 동시에 신뢰의 대상이며, 

역설적인 대상이 사랑이었다.

 

사랑은 이성적으로는 풀수가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성은 사랑과 함께 사는 날이 거의 없다지

- 셰익스피어 [한 여름밤의 꿈] -

 

한 여름밤의 꿈 대사라니..!

 

한글 번역한 대사보다는 

영어가 느낌을 더 잘 살리기에.

 

아마 저 대사는

And yet, to say the truth, 

reason and love keep 

little company together nowadays

이것이지 않을까 싶다.

 

보텀의 대사 중에

가장 '이성적'인 대사가 아닌가.

 

위 말을 교수가 인용했을 때,

얼마전에 내가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포스팅 했던 것이 생각났다.


<사진 출처 : facebook.com/lovedcause>

 

이처럼 이성을 잠시 외출하게 만드는 사랑을

오늘날에는 이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그리고 화학적으로 분석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사랑에 대해 해부를 하고,

사랑에 대한 결과물로 알약 몇알을 먹고

사랑에서 오는 고통조차 약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것들이 과학적으로 풀이가 가능하며,

과학 지식이 정복 못할 것이 없는 것일까?



위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다.

편할지는 모른다.

다만 불편과 노력을 배제한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아프게 고민하는 이 시간의 무게가

가벼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행복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었다면 

행복이라 불리지는 않을 것이다.

 

"카페인이 없는 커피를 마시는 것"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이상이었다.

커피맛을 보고 싶어하지만, 부작용이 있다.

그러한 부작용이 제거되어있기를 원한다.

 

심지어는 섹스조차, 적절한 쾌락만을 쫓는다.

 

군더더기 없는 사랑,

불편 없는 사랑,

 

이 실체가 없는 모호한 '사랑'을 설명하고 정의하고자 

교수는 영화 4편에서 나온 인물들을 통해 

'사랑'을 설명하고자 했다.



첫번째 영화는 <노예 12년> 감독 스티브 맥퀸이 

2011년 제작한 <Shame>이라는 영화다.

교수는 이 영화를 "거지같다"라고 표현했다.

 

영화 속 주인공 Brandon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소모한다.

섹스를 통해서.

오르가즘이 아닌 그저 

자기 자신을 분출하고 소모하는데에

 

공허

허무

분노

좌절

 

영화 끝에 그는 진실된 사랑을 찾아 떠난다.

하지만 그 끝에서도 그는 분출을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가 이 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의 섹스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교수가 "거지같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변할게 없다는 것을 알아서 였지 않을까.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대다수의 평은 1번 보고 

다시는 또 보기 힘든 영화라고 하였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 밑에 

밑바닥을 보여주어서가 아닐까.



오늘날 모든 심리적 문제의 해결을 

의사들은 신경 전달물질에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항우울제를 처방한다.

모든 종류의 심적 고통은 

프로작과 같은 알약으로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랑으로 인한 공허도.



언젠가는 마치 상비약처럼 될지도.

영화 <Equilibrium>의 사람들이

매순간마다 자발적으로 주사하는 것처럼.



교수는 사랑이 과학에 의해 정복된 시대에서

사랑이 희박해진 시대에서

어떻게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세상이 

"거지같다" 

"다 쓰레기다"

표현을 여과없이 말하였다.

 

'사랑'

'혁명'

 

그가 중요시 여기는 이 두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고 동시에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랑 = 혁명

둘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혁명은 현재의 세계와 다른 세계에 도달하게끔 한다.

우리가 거듭나는 경우를 느끼게 하는 것은 

사랑에 빠졌을 때이다.

 

개인의 변화는 사랑

세계의 변화는 혁명

 

사랑과 혁명

두가지는 관계맺음이 수반되기 때문에,

닮은 꼴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청중에게 세개의 질문을 던졌다.

 

1. 진실이란 있는가?

2. 필연성이란 있는가?

3. 보편성이란 있는가?

 

오늘날에는 매칭 서비스 '듀오' 처럼 

사랑이 서비스가 되어버린 시대인데,

이 세가지 질문에 답변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는 사랑이 비록 인기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오늘날이지만,

사랑을 탐구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사랑의 윤리학'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파이란>을 그는 소개했다.

 

여기서 그는 멜로 영화의 어려움을 잠시 이야기하였다.

로맨틱코미디가 아닌 

'사랑의 보편성'을 다뤄야하는 

멜로 영화의 어려움에 대해.

 

이 영화는 언어에 대해 논란을 가져온다고 하였다.

언어 & 사랑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를.

 

"너를 사랑해"

 

이 말은 모든 것을 바꾸고 얼려버리는 말이라고 하였다.

친구가 '사랑'이라는 단어로 인해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람

더 없이 불편하거나

더 없이 황홀하거나

미쳐버리게 된다.

 

이 언어의 힘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영화 <파이란>

 

사랑이 선언되었다.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나일 수가 없다.

나에게 선언된 그 사랑이라는 말을 떠맡기 위하여

나는 모든 공리적인 욕구를 포기할 수 있다.

사랑을 위해 내게 약속된 

쾌적하고 안락한 삶을 기꺼이 양보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이 나에게 죽음을 요구할 지라도 말이다.

 

배우 최민식이 연기했던 '강재'가 그런 사람이었다.

 

오늘도 호구

내일도 호구

영원한 국가대표 호구

 

그의 삶은 선언으로 인해 바뀌었다.

 

한 여인의 무책임할 수도 있는 

죽기 전의 마지막 말이 그를 바꿔놓았다.

 

강재씨, 당신에게 줄 수 없는 것, 

아무것도 없어서 죄송합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사랑하는 강재씨 안녕

 

이러한 일회성,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건은

'선언'으로 인해 발발했다.

예고된 것이 아닌 우발적이기에,

필연적이라고 하는 것.

 

'사랑'은 또한 시간에 구속되어있지 않다.

우리가 사랑한다 말할 때,

"3년간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영원히 사랑해"

사랑은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



3번째 영화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였다.

내가 이 책을 중학생 때 읽어서 내용은 가물가물했지만,

사춘기 시절 혼란만 주었던 책이었다.

 

프란체스카는 여기서 자신이 

굳게 사랑했다고 믿고 있다.

사랑에는 수 많은 이유는 열거할 수 있으나

그 원인을 정의할 수는 없다.

 

우리는 너무나 원인을 알고 싶어하지만,

원인은 찾을 수 없다.

 

"왜 나를 사랑해?"

 

이 질문에 그 어떤 답변도 이유가 될 뿐,

사랑의 근본적 원인을  밝히지 못한다.

그저 동업반복적인 "사랑하니까"라는 답변 밖에는.

 

원인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교수가 말했다.

 

교수의 예시에서 

요즘 <세월호 침몰 사건>이 생각이 많이 났다.

 

오늘날 많은 이유는 존재하나

원인은 없다.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음모론"

"Conspiracy Theory"

 

위와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발생한다고.

원인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원인을 찾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이유에 불과하고

이로 인해 투쟁의 부재를 가져온다.

투쟁이 부재가 곧 음모론으로 연결되며,

소문을 만들어내고

이를 두려워하거나 즐기거나 한다고.

 

오늘날 사랑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서

이유만 난무하고 

원인을 찾으려고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지막 영화로 그는 <Amour>를 꼽았다.

 

'윤리'와 '사랑'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이 영화를 

그는 '공감'이라는 요소와 함께 설명을 하려고 하였다.

 

'공감'은 차별성을 배제시키고

오로지 1인만 있다는 가정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살면서 자주 듣는 "고객님"이라는 호칭도

모든 손님이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개별성을 배제하고 대한다는 것.

 

영화에서 조르주는 아내에게 '공감'하면 할 수록

죽여달라는 아내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끝에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이 

기독교 신학에 관심을 많이 가진다고 그는 말했다.

특히 '바울'에 대해.

 

십계명 중에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웃을 '바뀔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특히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을 했는데,

예를 들어 필리핀 이주 여성이 있는데,

레이디 가가를 좋아하고, 빅맥을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오면 

생전 처음 입는 전통옷과

 필리핀 전통 음식을 요리하게 하는

괴물과도 같은 프레임을 강제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관용과 배려가 용납이 안되는 곳에서 

적용되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교수가 생각하는 

삶의 보편적 원리를 맺는 말로 말해주었다.


사랑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

필연적으로 기꺼이 승인하는 것.

전혀 다른 존재를 형성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창립하는 것.

 

교수는 사랑에 대해 보편성을 끄집어 내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 했다.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질문이 주어질 때, 

심각하게 동요하고 생각을 바꾼다.

특히 사랑에 대해 실패할 때 마다 

그런 것은 없고 내가 속았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에 대해 좌절할 때,

우리가 알던 사랑에 대해 거부한다.

 

오늘날 불신의 시대라는 것은,

진정으로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 지적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고, 혁명을 믿지 않는다.


Q&A 시간에 추가적으로 이야기했던 점에서는

교수는 무언가를 믿고 있는 것만큼 

추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특히 열성 기독교도를 '몰상식'하다고 말했다.


변화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위해 

믿음의 대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믿음이라는 핑계거리를 생산해낸다고.


그는 이 변화에서 믿음의 대상이

근본주의적인 종교로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통해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하였다.


강의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인 혹은 보수 성향을 가진 사람이 듣기에는

불편한 자리였다.


하지만 십계명 처럼 그도 "이웃"이며

자신이 정의한 것처럼 "바뀔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의 혁명은 없다고 말하는 그.


이제 남은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마저도 퇴색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그는 갈수록 말할 것이 없는 

Les Miserables 라고 느껴졌다.


 

그의 표현을 빌어 

추한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처럼, 남아있는 것이 사랑뿐이라면,

그 사랑은.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 1 John 4:8 - 



2014 <두산인문극장 : 불신시대>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이번에는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의 

<게보와 그림자> 라는 영화를 관람했다.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Manoel de Oliveira)

1908년 12월 11일

포르투갈 출생

 

현직 감독 중에는 최고령자이다.

무려 105세.

 

이분의 영화 스타일은 매우 정적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최소한이고,

Minimalism으로 최대한 프레임 안에서 

주변 환경과 소품을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상징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배우들에게는 스타일리쉬한 연기를 요구한다고 한다.

특히 연극적이지만,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요구한다고.

 

참 까다로운 영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O Velho do Restelo 

(lit. The Old Man from the Restelo) 라는

 단편영화를 제작중이란다. 

(2014.4.9 촬영 시작)



게보와 그림자

이 작품은 원작은 Raul Brandao

연극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는 6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고 한다.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 영화를 제작하는데 총 25일.

원테이크로 간 것은 아니지만, 

왠만한 장면들은 끊김없이 고정 카메라를

여러대 사용해서 제작했다고 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엄청 어두운 분위기다.

포르투갈 출신 감독의 프랑스 영화이다보니

영화 첫 장면부터가 다르다랄까.

특히 음악은 마치 라이브 오케스트라가

옆에서 연주하는듯한 분위기였다.

 

한 남자가 항구에 서 있다가 움직인다.

어두운 골목.

손이 나오고,

그 남자는 어둠속에서 있다가 나오면서 

도망가며 외친다.

"내가 하지 않았어"

 

마치 연극의 시작과도 같았다.



영화 내내 카메라의 움직임은 최소한이었다.

매우 평면적이었고, 정적이었다.

감독의 105세라는 나이때문일까 라는 생각도.

 

정말 연극적인 요소가 너무 많았다.

며느리는 독백이 많았고,

상황을 설명해주는 나레이터와도 같았다.

어찌보면 게보의 집에서 

며느리는 나레이터와 같은 존재인지도.



영화는 보는 내내 어둡다.

아무리 촛불이 키고 날이 밝아도.

마치 제목처럼.

모든게 다 그림자 속인 것만 같다.

게보의 그림자, 제목처럼.

 

게보는 끊임없이 아내를 속인다. 

아내의 환상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게보도 며느리도 노력한다.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싶어하고 

아들이 곧 희망인 아내지만,

이미 8년째 수배중인 아들이 

잘 지낸다는 거짓말을 한다.



아내는 매우 감정적이다.

그 감정에 휘둘려서 산다고 해야될까.

실체가 없는 것에 묶여서 사는 모습이다.

그래도 게보의 집에서 

가장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들의 첫 등장은 

이 영화에서 파격적인 장면이 아닐까.

가장 동적이고도 요란한 등장이었다.

엄마의 우울한 감정과 매우 상반되는 

UP된 감정의 극을 보여줌으로

엄청난 대비를 보여주었다.

아들의 등장 만으로도 집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게보는 영화가 흘러가는 내내 

반복적으로 계산을 한다.

그것도 아주 느리게.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게보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그가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도, 

아내를 위한다기 보다는

변화를 싫어하는 자신을 위해서.

 

그는 회사에서 정직한 게보로 불리우고 있다.

하지만 집에서는 정직과는 다른 모습으로 행동한다.

불쌍한 게보.

그게 그의 실체다.

 

특히 그의 대사 중에

Good fortune in life is when 

nothing happens

그의 삶의 좌우명 수준이다.

 

며느리의 "Good fortune is routine?" 질문에

Good fortune is always doing the same works 

and saying the same words

라고 답한다.

 

이때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가장 위험한 사람은 바로 게보 자신이었다.

며느리도, 아들도, 아내도 아닌 바로 게보 자신.

자신이 행복이라 생각하는 것이 변하고 무너질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게보는 영화 중반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그림자 아래 살고 있어.

평화는 오로지 잠 잘 때,

그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어

 

아들이 돌아와 말한다.

집은 숨막히다고.

가족들 모두가 다 일그러졌고,

다 다르다고.

 

아들은 돈을 훔쳐 달아나기전 

고뇌하면서 말한다.

자신에게 다른 모습이 있다고.

밤이 되면 자신이 주체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이 깨어난다고.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Everyone commits crimes,

at least in their thoughts.

 

과연 아들은 존재하는지 의심이 든다.

게보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밤의 어두움 보다 더 짙은 내 영혼의 어두움"

"내가 악이며 누구도 내일 범죄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림자는 있다.

 

  

영화에 대해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된 기사가 있다.

참고해보면 좋을 것.


http://cinema-scope.com/features/a-murderer-cannot-avoid-death-thoughts-on-manoel-de-oliveiras-gebo-and-the-shadow/


2014년 4월 1일 2시 프레스콜 공연

2014년 4월 6일 정기공연(관객과의 대화)

 

총 2번을 보러다녀왔다.

처음에는 프레스콜 공연을 보고 

끝내려고 했지만, 

프레스콜 공연 때 

수많은 셔터소리에 

도무지 극에 집중할 수가 없다보니,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장점 외에는. 

(정작 사진은 많이 안찍고 연극 보기 바빴다)


'관객과의 대화'가 있는 날 공연을 다시 왔다.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이번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에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

 

주제로 하는 연극이기에 가기 전에 

어떤 작품인지에 대해 찾아보았다.



Gina Gionfriddo (지나 지온프리도)

 

드라마는 

<Law & Order> <Cold Case> <House of Cards>와

<Rapture, Blister, Burn> <Becky Shaw> 등 

다양한 작품을 썼다. 

 

이번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의 

첫 연극 작품으로는 <Becky Shaw>가 준비되었다.


<Becky Shaw>는 이미 제작되었던 작품이었고, 

그때도 큰 센세이션은 아니지만, 

잔잔한 파동은 주었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공연 보러가기 전에 대충이라도 

대본을 읽어보고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인터넷에 찾을 수가 없었다.

두번째로 보러 갔을 때는 

기자단 리뷰 작성을 위해 녹음을 했다.

개인적으로 좋은 대사들도 많아서.

 

국내에는 번역본 조차 나와있지 않던 상황이라서.

뒤늦게 오늘 공연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이화여대 통번역연구소에서 번역을 했다고 한다.

 

영국에 있는 Almeida Theatre 에서

제작되었던 자료를 찾을  수 있었고,

공연을 보러가기 전에 읽어보고 갈 수 있었다.



다른 극장에서도 제작되었지만, 
내가 찾은 배부자료가 Almeida Theatre자료다 보니.
Almeida Theatre에서 제작된 홍보용 티저 영상이다.

연출인 Peter DuBois는 

Gina Gionfriddo 와는 Brown University 동창 사이.



Almeida Theatre <Becky Shaw> 포스터.
한국 포스터와 색채 사용은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다르다.
Almeida Theatre에서 제작된 것은 
약간 어릴적 보던 Archie 만화 느낌.
외국에서도 <Becky Shaw>를 
마치 한편의 시트콤이라고 표현을 한것을 봤는데,

포스터도 어두운 분위기 보다는 밝은 톤을 사용했다.


국내 <베키 쇼>의 연출은 박근형 연출 (극단 골목길 대표)였다.
2000년대부터 각종 연극 관련 상을 받은 경력이 있다.


배우


신덕호 (맥스 가렛 역)



이연규 (수잔 슬레이터 역)



강지은 (베키 쇼 역)



  김도영 (수잔나 슬레이터 역)  



박윤희 (앤드류 포터 역)

캐릭터 설명
Almeida Theatre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보니, 
한국판과는 다른 점이 있을 수도 있다
Almeida Theatre 자료는 
첨부파일에 있으니 확인할 수 있다.

수잔나 슬레이터
수잔 슬레이터의 딸, 35세, 
아버지의 죽음에 큰 영향을 받았고, 
감정적이고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맥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앤드류와 결혼했고,
앤드류 또한 사랑한다.
심리학 박사학위를 공부중이고 
어린이들을 심리치료하는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수잔 슬레이터
50대 후반의 나이다.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으며, 
자녀들과는 다르게 
감정과 죽음에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남편 리처드가 죽은 이후에 
어린 애인 레스터를 만나고 있다. 

맥스 가렛
나이는 36, 
수잔 슬레이터와 리처드 슬레이터에 의해 길러졌다.
어릴적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아버지는 화이트 칼라였지만,
계속 감옥에 들락날락하면서,
맥스를 버리려하지만,
리처드가 그를 불쌍히 여겨서 아들처럼 키워준다.
그는 많은 부자들의 자산을 관리하고 
리처드의 자산 또한 관리하고 있다.
여자관계는 복잡하다. 
보통 3개월 이상은 지속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의 연약한 모습은 싫어한다.

앤드류 포터
앤드류는 원래 작가지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결혼 직후 사무직으로 일을 한다.
사무직으로 일하는 것은 만족하지 않고 있다.
스키 여행에서 수잔나를 만나 결혼했다.
수잔나를 사랑한 것은 그녀의 연약한 모습이었다.
높은 연봉보다는 삶의 행복과 만족도를 위한 
이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맥스와 대조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연약한 여자에게 쉽게 끌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베키 쇼
나이 35세,
앤드류의 사무실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다.
재산도 없고 차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가족과는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
브라운 대학 중퇴, 안정적인 삶을 꿈꾸고 
정신과 치료도 받은 적이 있다.
이성과 교제를 가진 경험은 있지만, 
좋게 끝난적은 없다.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프리셋 장면.
프리셋은 다소 심심했다. 

회색의 낡은 느낌의 벽면과 고풍스러운 듯하지만, 

비싸보이지 않는 느낌의 호스텔 분위기랄까.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리처드 슬레이터가 죽고 
그 죽음에 슬퍼하는 수잔나 슬레이터,
그리고 자산 관리인으로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 맥스 가렛,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남편이 죽은지 6개월만에 
자녀 뻘의 레스터와 교제 중인 수잔 슬레이터,

남편이 남자였던 그의 비지니스 파트너와 
부적절한 관계에 있던 양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고,
슬레이터가의 자산이 거의 파산 직전이라는 것.
수잔은 레스터에 더 관심을 쏟고 
결국 자산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아버지의 죽음에 깊게 빠진 수잔나는 
맥스에게 위로를 받고자 한다.
맥스는 친여동생은 아니지만, 
동생처럼 25년간 살아온 수잔나와 하룻밤을 잔다.

이때 떠올랐던 것은 지난 민승기교수님의 강의에서 
"한번의 키스가 존재에 균열을 낸다"
라는 말이었다.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친동생 처럼 25년간 함께 살아온 동생과 
키스를 하고 성관계까지.
어찌보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작은 균열을 만들어 낸 것은 맥스와 수잔나가 아닐까.

매춘? 결혼? 다 같은거야.
서로 원하는게 있기 때문에 
두사람이 함께 하는거야
사랑은 그저 감각이야.
배고픔이나 추위처럼.
우리가 생존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주는 감각.
- 맥스의 대사 中 -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수잔나는 기분 전환하기 위해 갔던 
스키 캠프에서 앤드류를 만나 결혼했다.
맥스와 하룻밤을 잤던 날부터 8개월이 지난 시점.
수잔나와 앤드류는 
맥스와 베키 쇼를 서로에게 소개시켜 준다.

맥스와 베키는 단둘히 데이트를 나가지만,
데이트도 굴곡이 있었다.
강도 당하고, 맥스는 베키와 하룻밤을 지내고.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맥스는 연약함은 인정 못하는 성격이라서,
베키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
베키는 의존적이다.
문제는 의존적인 모습이 
앤드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
처음에 수잔나에게 호감을 느꼈던 이유가 
'다친 양'같아서 였는데,
더 이상 수잔나는 '다친 양'이 아니라서.

앤드류는 지속적으로 
'영웅'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데 그런 사람이다보니.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결국 앤드류의 이러한 모습이 
수잔나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결혼 생활에 위협을 느낀다.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거부하는 맥스.
계속 다가가는 베키.
맥스를 사랑하는 수잔나.
수잔나를 사랑하는 앤드류.
맥스로부터 통제받는 것에 익숙한 수잔나.
그러한 통제를 주지 못하는 앤드류.

모든게 다 엉망이 되어버렸다.

극의 끝 장면은 맥스가 앉아있고 
그 뒤로 베키가 다가간다.
마치 모든 것을 주도하고 통제하던 맥스의 주도권이 
베키에게로 전달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과연 행복할까.
과연 사랑했을까.

끝에 우정을 운운하는 맥스를 보며,
다들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랑'은 아니었던 것.


극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극 중간에 배우의 대사에 맞춰서 
극 무대가 움직이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관객의 몰입도를 방해할 수 있을텐데,
그 순간 내가 보는 것이 '연극'이라는 것. 
관객에게 갑자기 이 모든게 
다 실제가 아닌 거짓이라고 느끼게 했으니까.
무슨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인지 물어봤다.

연출님은 다른 작품에서 
회전 무대를 사용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Armeida Theatre에서 그렇게 했다)
두산인문극장 스페이스111이라는 
환경 내에서 시도는 했지만,
큰 성과는 없는 시도였다고 말해주셨다.




번역 극의 특성상 원작에 비해 
많은 부분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다른 곳에서 했던 <Becky Shaw>의 영상을 봐도.
그래도 나름 한국화하고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바꿔주었고,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두산 인문 극장에서 
4월 26일까지 하는 <베키 쇼>에 가볼 것.

끝으로 내게 인상 깊었던 대사 중 하나.

"남자가 착하다는 것은 종종 무능력과 짝을 이뤄"
- 수잔 슬레이터 대사 中 -

착하게 살 수 없는 세상
우리 사회는 이대로 지속될 수 있는가?



알메이다 극장 베키쇼 참고자료.pdf




강연을 가기 전에 

며칠 전 샀던 신발을 환불하러 

현대백화점 천호점에 갔다.

 

항상 살때는 이쁜데 막상 집에와서 보면 별로인.

백화점 이펙트일까.

 

요즘 날도 풀리고 꽃도 만개했고 더워지고 있다.

 

 항상 여름만 되면 빙수로 여름을 버티는데

 이번에는 좀 이른 빙수를 시작. 

 

현대백화점 천호점에도 밀탑이 생겼다고 해서.

 

가격이 오른듯? 

7000원대였던걸로 기억하는데

8000원이었다.

맛있긴 한데, 

요즘에는 빙수 밀탑처럼 만드는 곳이 많아져서.

앞으로 계속 갈지는 미지수.



이번 <두산인문극장 : 불신시대> 두번째 강의는 

민승기교수님의 

'오! 나의 친구여 친구란 없다' 라는 주제로 시작되었다.



민승기교수님은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이시며, 

해체론, 정신분석, 그리고 데리다와 라깡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렇다보니 강의의 제목 또한 

데리다의 저서 <우정의 정치학>에서 분석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 나의 친구여 친구란 없다'이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대주제의 첫 강연으로

 '우정'이라는 이름의 '사랑'에 대한 강연이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라는 개념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개념과는 다르다.



'두개의 몸'에 존재하는 한개의 영혼.

교수님께서 강의 때 말씀하신 '겹침'이라는 것일까.

'사랑'하면 필수적으로 생기는 '겹침'


르네 마그리트 '거대한 나날' 1928

 

르네 마그리트는 자웅동체를 그렸지만, 

남녀 사이에서 겹침의 지점, 즉 '혼돈'이 존재한다는 것.

 

교수님은 강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파울 첼란의 시를 읽어주셨다.

 

그것은 하나의 울림.

그것은 진리 자체가 인간들 가운데로 오는 것.

은유의 눈보라 가운데로.

 

그렇다면 '사랑=울림' 인가?

 

매 강의가 지속될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보다는 단순해지는 것 같다.

어려운 주제일지라도 답은 하나.

 

아카페, 필로스, 그리고 에로스.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한다.

부모와 자녀 그리고  친구사이의 사랑은 필로스.

본능 그리고 낭만의 사랑 에로스.

 

틈이 없고 차이가 없는 것은 에로스.

극복할 수 없는 거리를 가진 것은 필로스.

내제 되어 있지만, 틈을 가지고 있는 아가페.

 

사랑이 이토록 어렵던가.

교수님께서도 말하셨다. 

해체론은 간단한 것도 어렵게 한다고.



필로스는 사랑의 대상이 살아있음에도 

부제를 염두에 둔다고 했다.

온전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언젠가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 

죽음이 있을 수도 있기에.

하지만 그 거리로 인해 사랑이 유지되는 것이기도 하다.



에로스는 마치 E.T처럼.

연결되어있어야 한다.



아가페는 다르다. 

내 안에 있어야 존재한다. 

나를 벗어나고는 살 수가 없다.

나 또한 살 수 없다.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포옹이다.

포옹을 했을 때 겹치는 부분이 있다.

이곳은 남아도는 부분이기도 하면서 

제3의 공간이 되어버린다.

철학은 심리학 부터 신화까지 

많은 영역을 두루 알아야 되는 것 같다.

'포옹'에서도 신화를 차용해서 설명하는 것을 듣고.

 

들으면 들을수록 

인문학이 얼마나 성경적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제우스가 인간을 반으로 가르고.

우리가 죄로 인해 분리되고.

아담으로부터 분리되어 여자가 생기고.

또 다시 붙고.

아프로디테와 헤파이스토스의 이야기를 통해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

 

다시 제목으로 돌아와서,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

 

미래와 과거의 친구 모두를 포함해서 

그 존재를 無로 돌려버리는.

결코 화합할 수 없는 간극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는게 불편한 것이다.

'겹침' 이 불편한 것.

 

'겹침'은 차이가 아닌 

동질성을 갖춘 것이 부딫이는 것이므로

잉여물이 생긴다.

사랑의 메아리.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잉여물이 사랑인가?

 

도대체 사랑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친밀한 것들이 낯설 때, 

리는 사랑했나?



'난 널 사랑해'

결국 이 말도 누군가가 했던  말이다.

그 사람의 '사랑해' 와 나의 '사랑해'는 동일한가?

'나' 만의 사랑은 없다.

다만 이미 오염되어버린 변질된 말의 되풀이인가.

그렇다면 기계적인 반복이 

인간적인 사랑을 만들 수 있다고 봐도 무관한가.

 

언어가 사랑을 발생시키는가?


과연 순수한 사랑이 있을까?


교수님께서 롤랑 바르트가 했던 말을 인용해주셨다.


' 난 널 사랑해' 

이 말은 우리 매일매일 다시 시작하자를 확인하는 말이라고.


'사랑'이 매일매일 확인해야하는 

영원히 매꿔지지 않을 틈이었나.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하지 않은가?

적어도 신앙에서 나를 점검할 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삶이 연극을 모방하는가?

연극이 삶을 모방하는가?

 

이 질문에 혼란이 왔다. 

극 안에서의 삶을 꿈꾸지 않는가. 

영화, 연극 이러한 것들이 

현실에서 못보는 것들의 대리만족이 아닌가.

그렇다면 삶이 연극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가?

 


<우정>

 

"나는 너의 친구야"는 틈을 제공한다.

조르지오 아감벤의 강연문 '친구' 에서 그는

친구라는 말은 서술어가 아니며 

정의할 수 없는 단어라 하였다고 한다. 

내가 정의를 채워넣을 수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곳이 친구.


한창홍 '1994년의 사랑' 1994

 

장 뤽 낭시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다. 

비록 사랑에 대해 많이 이루어졌지만


사랑은 마치 내 속에 찔러 넣어진 칼 같다고 했다.

사랑은 조각난 상태로만 존재하고

칼은 나를 죽일수도, 

하지만 간직하면 칼은 꽂은 채로 살아있게.

불가능한 것을 품고 있는 것이 사랑.

 

"한번의 키스가 존재에 균열을 낸다"

 

틈.

균열.

 

사랑이 있긴 한걸까.

그냥 마치 끝없는 크레바스에 빠진 기분이다.



우리 시대의 친구는 

실시간 메시지 주고 받기 

그리고 네트워크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계산이 가능하다.

숫자로 바꿀 수 있다.

숫자로 할 수 있는게 과연 친구인가?


 

너무 어려운 주제의 강의였고, 

사실 내가 정리하면서도 잘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많았다.

내가 이해하는 선에서 최대한 적어보았고,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복잡한 내용이지만, 

답은 계속해서 하나라는 점이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가 사는 것.

모든게 다 아가페, 참 사랑으로 직결되더라.

 

오 나의 사랑 사랑은 없다.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의 

첫번째 강의 날,

 

강의를 가기 전에 군대에서 휴가나온 동생이랑 

약속이 있어서 공덕으로 향했다.

 

공덕역 족발골목은 

공덕역 5번 출구로 나와서 쭉  가서 왼쪽에 있다.

이곳은 자주는 오지 못하지만, 

방학이 되면 1번 이상은 찾아오는 곳이다.

족발도 먹을 수 있고 순대국도 계속 리필되니까.

 

하지만! 1번 이상은 찾아오지 않는다.

사실 술을 잘 안마시는터라,

이곳은 술 안마시는 손님에게는 

좀 노골적인 홀대가 있다.

엄청 눈치준다. 특히 할머니들이.

지난번에 겨울에 찾아갔을 때 

앉게 된 자리가 창가 쪽 자리였는데,

족발을 주문하고 앉았을 때부터

 할머니의 횡포가 시작되었던 적이 있다.

찬바람이 슝슝 들어오는 문을 

나는 닫고 할머니는 열고 반복하기를 수십차례.

그냥 기분이 상해서 빠르게 먹고 나왔다.

지난번에 가족끼리 먹으러 갔을 때에도 

술 안시켜서 엄청 눈치주던데,

친구랑 갔을 때에는 노골적이어서 

요즘에는 가면 그냥 마시던 안마시던 

남기고 오더라도 맥주 1병은 그냥 시킨다.

마음 편히 먹는 것에 대한 대가랄까.



두명이서 가서 족발(소)로 시켰다.

족발 (소)와 (대)의 뚜렷한 차이는 양도 있겠지만,

소 : 뒷다리 (지방층이 많다)

대 : 앞다리 (살코기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부드러운 뒷다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순대국이랑 순대도 무한 리필이라서.

최고로 좋아한다.



촬영도 끝. 자 이제 먹읍시다.

상병 우이삭씨.

전투식사 시작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두산아트센터로 이동!

종로 5가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오가약국'이 있는 코너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된다.



친절하게 이렇게 안내판까지.



두산아트센터 내려가는 길에 

아트센터 답게 많은 예술품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나의 시선을 끌었던 한 작품.

저녁으로 족발을 먹어서 였을까.

나는 작가분에게 죄송하지만 다른 제목을 주었다.

"내가 삼겹살을 바라볼 때"



그리고 이렇게 발로 연주하는 피아노도 있었다.


<사진제공 : 두산아트센터>


티켓박스에서 기자단으로서 이름을 확인 받고 입장.



오늘의 연사는 한병철교수님,

베를린예술대학에서 강의하고 계시다.

주제는 피로사회-투명사회-불신사회.

최근에 집필한 저서와 많은 연관이 있는 

강연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사진제공 : 두산아트센터>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대학생 부터 직장인 그리고 어른들도.

여기서 오랜만에 보는 친구도 만나서 반가웠다.

내가 앉아있던 자리는 무대 좌측 두번째 줄.

한병철교수님이 강연 나가기 전에 내 앞에 앉아계셨다.


<사진제공 : 두산아트센터>


한국말을 잘 못하셨는데, 

좀 많이 못하셔서 듣는 내가 답답했을 정도.

차라리 통역을 좀 많이 

사용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지만, 

그만큼 직접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져서 최대한 집중하고 들었다.

 

인문학이 무대에서 등장하면 저항력을 상실한다

학생이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참여와 저항 그리고 비평을 해야한다

 

인문학이 하나의 상품이 되는 것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오늘날의 저항력을 상실한 

인문학에 대해서도 비판을 거리낌없이 하셨다.

특히 오늘날의 인문학자에 대해 

'약장사'라는 표현까지 하면서.

 

"힐링"이라는 한국의 트랜드가 

인문학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심히 공감을 했다.

 

특히 오늘날의 "힐링"에 대해,

System이 바뀌어야 되는 것인데, 

Symptom만 해결하려는 근시안적인 모습이 

오늘날 장님을 만들고 있다고.

 

그분의 강의 중에 인상깊었던 부분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독일대학에서 

모든 일반인들이 강의를 참석하러 오는 

열린 강의라고.

강의를 수강하는 대학생보다 

일반인들이 더 관심많아한다는 것에서 

우리나라와 많은 차이점을 느꼈다.

 

오늘날의 인문학은 

'감정의 인문학' '욕망의 인문학'이라고도 하여 

사람들에게 달콤한 말을 제공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Digital사회는 

자유를 주면서 통제한다는 것에서 크게 공감했다.

특히 "좋아요" "사랑해요"로 통제된다는 것에서는 

쓴웃음을 질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사회가 왜 이렇게 가벼워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거세된 인문학"

 

나의 생각 : 감언이설을 즐기는 자는 필망할 것이다.

 

Communication이 자유의 공간이라 믿었는데,

통제의 공간으로 통제사회에 의해 넘어갔다는 말에

내가 생각하고 지향하던 

Communication이 없어진 것 같아 허탈했다.

 

SNS is no longer a free-zone.

Freedom is willingly restrained.

 

"PANOPTICON"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을 합성한 것이다. 

번역하면 '모두 다 본다'는 뜻이다.

 

원래는 죄수를 감시할 목적으로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르미 벤담(Jeremy Bentham)이 

1791년 처음으로 설계하였다.

이 감옥은 중앙의 원형공간에 높은 감시탑을 세우고, 

 

중앙 감시탑 바깥의 원 둘레를 따라 

죄수들의 방을 만들도록 설계되었다. 

또 중앙의 감시탑은 늘 어둡게 하고, 

죄수의 방은 밝게 해 중앙에서

감시하는 감시자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죄수들이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죄수들은 자신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결국은

죄수들이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팬옵티콘은 감시자 없이도 

죄수들 자신이 스스로를 감시하는 감옥을 말한다.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 

그리고 수감자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과사회"

스스로를 착취하고 우리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

피착취자, 가해자, 피해자는 동일하다.

이는 타자를 통한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감정의 자본주의"

우리는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사고 있다.

하지만 한계가 있는 소비다.

 

<불신사회>

 

오늘날의 사회는 투명하면서 불신이 더 많아졌다. 

투명성이 공동체를 보장하지 않으며 

공동체는 도덕성을 상실했다.

병든 사회 속에서 

투명에 대한 욕구가 더욱 증가되었고, 

불신은 더욱 악화 되었다.



강의 중에 1984년 슈퍼볼 하프타임 때 

쓰여진 Macintosh 광고를 보여주었다.

바야흐로 스마트한 권력, 

새로운 권력의 시대를 뜻했다.

빅브라더가 아닌 친절한 브라더로 변했다.

Authority가 사라진 것은 아니였다. 

다만 더욱 지능적으로 진화했을 뿐.

 

교수님께서 오늘날 Like는 아멘과 

고해성사와 묵주와 대등하다라는 말을 했다.

기분이 좋은 말은 아니었다. 

다만 사실이었기에 쓴 맛이 가득했다.

나조차도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이 쓰는 복음에 대한 글에 Like로 반응하지 않았나.

미쳐버릴 것만 같았지만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파괴하며 생산성을 증대한다 하였다.

정치인들에게 그리고 주변에 투명을 강요하지 말아라.

문제해결은 안되며 

오히려 위협만 줄뿐이다.

 

우리가 세금을 내고

그 서비스를 누리고자 하는 고객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깊게보라.

깊게 볼 때 문제 해결이 될 것이라는 것.

 

Multitude 보다 Solitude.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아직은 내가 많이 부족함을 느끼고 왔다.

하지만 이 또한 무대위의 인문학이었음을.

불은 내게 던져졌다.

이제 그 불을 꺼뜨리던지, 아니면 더 태우던지.

크리스천으로서 이번 강의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분의 모든 생각에 동의를 하는 바는 아니지만,


발언하는 천재보다 

침묵을 지키는 바보에 의해 세상이 바뀌는지도. 



두산인문극장 2014 수료과정과 

기자단을 모집하길래 지원해봤다.

선착순이다보니 빠르게 신청!

 

그리고 어제 결과 발표!

수료과정을 600, 기자단을 70으로 

추가로 선정했다고 한다.



짜자잔!

 

수료자로서 그리고 기자단으로서 해야 되는 미션 3가지!

 

1. 두산아트센터 홈페이지 회원 가입

2. [두산인문극장 2014] 강연 및 상영 9회 이상 참석

강연 9영화상영 3회 총 12회 중 9회 이상 참석 필수

3. [두산인문극장 2014] 연극 

<베키 쇼>, <엔론>, <배수의 고도세 편 관람


​강연도 참석하고 연극도 볼 수 있고! 완전 좋다. 

특히 기자단은 연극을 프레스콜 공연으로 볼 수 있어서 

사진 촬영도 할 수 있고 동영상 촬영도 가능하다는 것!

 

프레스콜 일정 : 

<베키 쇼>: 4 1(, PM 2:00)

 <엔론>: 5 7(, PM 2:00)

 <배수의 고도>: 6 10(, PM 2:00)

 

기자단이 해야하는 미션 또 한가지!

 

4. 강연영화연극 관람 후 일주일 내 

블로그페이스북싸이월드 등 

자신의 SNS 채널을 통해 후기 남기기



첫 강연인 한병철 교수님은 신청해놓았다.

저분의 책 <투명사회>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미드 <Person of Interest>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강연을 가기 전에 읽어봐야 겠다.


왜 '불신시대'인가?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속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함께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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