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 Story/Theatre



 관람일 : 2014.12.04,  22시

러닝타임 : 약 1시간 50분


 본 리뷰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비전문적인 리뷰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캐스팅으로 반복되는 노래 / 고독한 독고씨를 보았다.

전날과 다른 점은 <반복되는 노래>에서는 목동인 코리돈과 타이시스가 남자라는 점.

그리고 <고독한 독고씨>에서 성아 역을 맡은 배우가 다르다는 점.


오늘 리뷰는 전날 공연 본것과 유사하지만 새로운 생각들을 얻어갈 수 있었고

전 리뷰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해서 정리해볼 생각이다.


<반복되는 노래>


오늘 본 삐에로와 컬럼바인에서 유독 삐에로가 눈에 들어왔다.

전날 본 삐에로보다 확실히 배우가 조금 더 여유가 생겼고

무대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관객들이 반응을 해줄 때, 그때 삐에로는 더 살아났다.


다시 한번 연극은 배우 혼자만의 원맨쇼가 아니라

관객이 주는 것을 받아서 다시 돌려보낼 줄 아는 배우가

좋은 배우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번 <반복되는 노래>에서 가장 큰 차이점인 목동의 性변화는 기대감보다는 걱정을 앞섰다.


개인적으로는 여자 코리돈과 타이시스를 매우 즐겁게 봤었지만,

남자 둘이서 코리돈과 타이시스를 한다는 것이

연극 시작 전부터 마치 '퀴어'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될 것 같았다.


너무 선입견을 가지고 극을 보러 간 것일까.

두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데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밀당하듯 주거니 받거니 삐지고 하는 모습이 불편했다.

아마도 연출은 이러한 것을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남/여를 했다면 정말 재미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밀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비극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니까,

코리돈과 타이시스를 남자로 한 것은 적절한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브로셔에서 연출의 말 중

"인생엔 왜 비극이 있으며,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라는

비극의 시작점에 대한 답의 일부분을 삐에로의 대사에서 찾은 것 같았다.


코리돈과 타이시스의 죽음 이후에 삐에로는 다시 시작되는 희극 장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컬럼바인과 다시 대사를 나눈다.


"적당히 하지 뭐"


'적당히'라는 말이

오늘날의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고독한 독고씨>


공교롭게도 독고의 죄수번호는 '5270'이다.

앞서 <반복되는 노래>에서 삐에로가 언급했던 제품번호 '5270'과 같은 번호이다.


독고한도 <반복되는 노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앞에서부터 미리 티저 형식으로 나온 느낌이다.


<고독한 독고씨>의 첫 장면은 독고한이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보내달라며 절규하는 것으로 시작을 한다.

그리고 이 극의 끝은 독고한이 감옥 앞에서 자신을 들여보내달라며 절규를 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러한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

문제해결이라기 보다는 또 다른 <반복되는 노래>의 시작으로 보여졌다.


독고한은 극의 끝에서 성아에게 자신은 그저 이해받고 싶었다고.

그리고 성아는 그에 이렇게 답변을 한다.

"이해하지 못했나봐요"

각기 다른 자신들의 지나가버린 처지에 한탄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해받고 싶어 했고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독고한도 성아도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지 않았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편하게 느끼는 안식처 혹은 위험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있다.

그런데 이 피난처가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니게 될 때.

패닉룸처럼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던 곳이

오히려 자신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결국 독고한 처럼 묻게 된다.


구원자는 누구인가.

열쇠를 가진자는 누구인가.


답은 무엇인가.


이번 <고독한 독고씨>에서

'성아'역만 유일하게 더블 캐스팅이었다.

보통 주연을 더블 캐스팅을 하는 경우는 있어도

'성아'를 더블 캐스팅 하는 경우는

독고한을 연기한 배우에게 상당히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독고한을 연기한 배우에게 묻고 싶다.


'성아'역을 연기한 두 배우 중 어떤 사람과 더 호흡이 잘 맞았는지.




관람일 : 2014.12.3,  22시

러닝타임 : 약 1시간 50분


 본 리뷰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비전문적인 리뷰입니다.


이번 연기연출기초 수업에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두개의 단막극으로 이루어졌다.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있는 극 두가지를 연달아서 본다는 것은

관객에게 상당히 피로감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학교에서 보았던 두개의 동아리 극과는 다른 모습이길 바랬다.


나는 신파극보다는 비극을 더 좋아하기에.


연기연출기초 수업에서 작품을 공연하는 것은

최종률 교수님이 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공연을 올리는 경우는 없었다.


보통 공연영상학을 새롭게 전공하는 학생들이 주를 이루기때문에

공연을 올리기보다 기본적인 것을 배우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배우고 체득하는 것만큼 큰 배움은 없으리라.


맨땅에 헤딩도 하고 모르니까 멘붕도 겪고

나중에 자신들이 공연을 한 녹화영상을 보고 이불킥을 하더라도 다 추억이니까.

나도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랐던 영상을 가끔 돌려보고는 하는데

정말 부끄럽고 누구에게도 감히 보여줄 수 없는 영상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추억팔이용으로 곱씹어보기엔 딱이라서.


이번에는 이 공연에 대해 두번의 리뷰를 쓰게될 것 같다.

더블 캐스팅이라서 호기심에 두번을 보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노래 : Aria da capo>는

Edna St. Vincent Millay의 작품으로 독특한 이력의 작가였다.

페미니스트 였고, 여자 이름보다는 남자 이름인 Vincent로 불리길 바랬고

양성애자였다보니 그때 당시의 시대상과는 역행하는 '사랑'을 한 사람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죽음은 상당히 기구해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한 뒤 8시간 이후에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반복되는 노래 : Aria da capo>는 처음에 쓰여졌을 때 ANTI-WAR을 위해 쓰여졌으나

오늘날에는 우리 삶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모습을 조명하기 위해 작품화되는 듯 했다.



이번 공연의 무대는 정말 단조로웠다.

흰 식탁보와 대비되는 검은 의자, 그리고 흰 사다리

무대의 높낮이를 주기 위한 검은 나무 무대


이전까지의 최종률교수님 수업의 무대를 생각하면

예술적인 디테일, 세부적인 묘사와 다양한 색감 그리고 세밀한 음영을 그렸던 것이 떠오른다면

이번 무대는 교수님의 손길이 제일 닿지 않은 듯 했다.



흑백의 공간에서 화려한 삐에로 같은 복장을 하고 등장한

컬럼바인과 삐에로의 대사는 난잡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허세, 어리석음, 허풍 등 희극의 모습을 띄고 있다.

 

이 모습들과 크게 대비되는 모습은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들이다.

 

코터너스 연출이 등장하여 즐겁고 웃긴 희극의 배우들과 장면을 밀어내고

비극을 시작하려고 한다며 코리돈과 타이시스를 희극의 무대 위에 잔인하게 밀어 넣는다.

 

코리돈과 타이시스에게도 잔인한 일이지만,

관객들에게도 관객모독이라고 할 정도로 코터너스의 말처럼

양해를 구한다면서 공개 리허설인 비극의 장면을 반강제로 보게 된다.

 

코리돈도 타이시스에게도 무대 장치 하나 없이 희극 무대에서

코터너스에게 반항 하나 없이 비극을 시작한다.

 

비극이 완전한 시작을 갖추기 전까지 크게 희극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

 

앞서 등장했던 컬럼바인과 삐에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타이시스과 코리돈이 대사를 틀리기도 하고 엉터리로 읽기도 하면서

관객들을 다시 희극으로 몰아넣는 듯 했다.

 

즐거운 게임을 한다며 담벼락을 쌓기 시작하는 코리돈과 타이시스

보이지 않는 벽을 완성시키고는 갈수록 불신이 깊어진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가 기르는 양에게 물을 주지 않고

코리돈은 보석을 찾기 바쁘고 타이시스는 보석에 욕심을 내고

물을 달라는 코리돈에게 물에 독초를 풀어 넘겨준다.

 

"양들에게 물을 주는데 네 것 내 것을 가려야해?"

 

우습게도 이 대사를 들으면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 교회 저 교회 성도 뺏어오기 부터 담벼락 쌓는 교회의 모습.

세상을 향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끼리 배척하고 배제시키는

교회의 모습이 떠올라서 씁쓸했다.

 

물을 주는 것처럼 속이지만, 그 물에는 독초를 풀어 주는 목동.

물을 재물을 주고 교환하려는 모습과 목마른 양보다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고는,

결국에는 재물로 목을 조여 다른 목동을 죽이려는 목동.

 

진정으로 양을 위하는 목동의 모습이 아닌 것이

오늘날 몇몇 교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더라.

 

코리돈과 타이시스가 희극의 무대에서 갈수록 비극이 고조되는데

연출인 코터너스는 의자에 앉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서 침묵하고, 잠을 자고 있다.

 

비극을 시작하라고 했고, 대사를 정해주었고,

그 비극의 주체들은 그 대사와 제한적인 무대 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연출한 연출자는 잠을 자고 있다.

 

연출자는 최상의 권위라고 느껴졌기에,

인간의 비극에 침묵하고 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극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만든 권력과 권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을 초래하고 연출한 기득권들을 향한 손가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작은 연못의 물을 가지고 싸움하는 목동들을 지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는 코터너스는 권리를 가졌지만 책임은 도외시하는 기득권들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오류를 보고도 도외시 하는 우리들일지도 모르겠다.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당연,

벽이 있다고 굳게 믿던 코리돈은 죽음 앞에서 “벽은 원래 없었다.”라며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오해하고 불신을 했는지 쌓아온 만리장성을 한순간 무너뜨린다.

 

코리돈과 타이시스의 죽음 이후 연출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

두 사람의 주검위에 흰 천을 덮어놓고 나간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희극.

 

코리돈과 타이시스의 주검위에 희극의 무대가 들어서고

다시 컬럼바인과 삐에로는 다시 그들의 반복되는 허풍과 거짓의 대사를 시작한다.

 

관객들은 아까처럼 희극을 볼 수 있을까?

 

글쎄다.

 

"희극이 시작되면 관객들은 비극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릴 겁니다."

 

연극을 통해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희극은 비극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모습이었다.


누군가의 비극은 누군가에게는 희극일 것.

하지만 우리가 결국 기억하는 것은 희극이라.

 

관객들뿐만 이겠나.

 

살아가면서 아픈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것을 곱씹어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픈 기억은 빠르게 떨쳐버리라는 것과

긍정적으로 살라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적인 조언이다.

 

하지만 잊어야 할 비극이 있고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 있다.

그런데 잊어야 할 비극보다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 더 많은 것 같다.

 

그 비극이 없다면 오늘날의 나도 우리도 당신도 있지 않을 테니까.

 

우리들의 죄로 인해 시작된 비극, 인류 최초의 비극.

그 죄로 인해 나도 당신도 그렇게 아픈 것이 아니겠나.

그리고 그 아픔을 홀로 짊어지고 가실 분이 와야만 했던 것도.

 

이번 한해도 벌써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비극이 많았던 한해였고, 비극의 연속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파했고,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도 그 비극에 동참을 했었다.

 

다음 생에는 영원한 행복 속에서 살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다면,

이 땅에서 찰나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할 몫이 있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 비극을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수요일 10시 공연은 김수민 배우가 코리돈 역을,

박정은 배우가 타이시스 역을 맡았다.


김수민 배우는 이전에 뮤지컬 무대에서 본적이 있었는데, 연극은 처음이었다.

이번 코리돈 역에서 타이시스와 담쌓기 게임을 하다가,

타이시스를 죽이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 전환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거짓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죽일 것처럼 그 감정이 느껴졌다. 그 뚜렷한 대비가 정말 좋았다.


극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소품없이 몸짓만으로 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전에 2008년에 마임을 했던 이두성 교수님이 생각났다.

그분이 학교에 계속 계셨다면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실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한 독고씨>의 작가인 Norman Holland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고독한 독고씨>의 원작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극에 대한 이해도는 앞선 작품보다 덜 알고 갔다.

어떠한 이름에서 <고독한 독고씨>로 번역이 되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주인공인 독고한은 죄수였다.

밥을 먹으라면 먹고, 잠을 자라면 잠을 자고,

모든 것이 통제되고 구속된 감옥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부분은 그의 생각.


자유롭게 아내를 만나러 가고,

옛 사업 파트너를 만나로 가고,

또 애인을 만나러 가고,


그의 생각 속에서 낭만 가득했고, 긍정적이고 행복할 것만 같았던

현실은 출소 후에 모든 것이 뒤바뀐다.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재혼하였고, 사업 파트너는 그를 문전박대하고,

애인이라고, 자신을 민우라고 불러주던 사창가의 연인은

술과 약에 찌들은 추한 꼴이 되어있고,

그의 생각 속에서 긍정적으로만 보이던 것은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

극의 끝에서 그는 다시 닫혀버린 감옥 문 앞에서 소리친다.


"날 들여보내줘"


<고독한 독고씨>를 보며 영화 <쇼생크 탈출>이 생각났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한 노인이 오랜 기간의 수감 후에 출소를 하지만,

세상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현실을 마주하지 못한 체 스스로 삶을 끊는다.


독고한도 극의 끝에 자신을 들여보내달라는 절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삶을 끊거나, 다시 감옥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원하지 않는 익숙함"


분명 원하지 않는 상황이다.

감옥 안에서 독고한은 철창문이 닫히는 그 소리가 너무나도 싫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익숙해진 것이다.


닫혀있는 것, 갇혀있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핵심감정"이라고 사람마다 느끼는

주요 감정의 고리를 계속해서 맴도는 것처럼

독고한도 그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독고한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지금 내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혼자 있는게 싫었는데 이제는 그 혼자가 너무나도 편해졌고 익숙해졌거든.


독고한의 막 전환 때 들려오던 지하철 터널 속 굉음과도 같은 소리.

끝을 알 수 없이 계속해서 어둠속을 달려가는 소리가

독고한의 끝없는 어둠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벗어나기 어려운 익숙함.


익숙함을 때어버린다는 것은 많은 아픔을 수반하는데 그 아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독고한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아픔이 더 커서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믿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배신.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가치가 상실할 떄,

이제는 자신이 폭탄을 피할 곳이라고는 감옥 외에는 없다는 것을.

자신을 진정으로 구원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을.


 

수요일 10시 공연은 박한나 배우가 성아역을 맡아서 하였다.

<고독한 독고씨> 중에서 유일한 더블 캐스팅인데,

'성아'의 온전했을 때의 연기와 술과 약에 찌들은 연기가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술과 약에 찌들은 연기가 더.


주인공은 독고한은 정말 역할에 딱 맞는 캐스팅이라고 느껴졌는데,

왠지 다음 작품은 목사님이나 약간 불쌍한 역할만 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장여사는 맛깔나게 연기했다.

화내는 부분도 재미있었고.


아내는 좀 아쉬웠다.

내가 너무 한국 막장 드라마의 연기를 바랬는지 몰라도

독고한의 심장을 그 누구보다도 가차없이 후벼팔 수 있는 사람은 아내였다,

그래서 기대치가 높았던 것 같다.

독고한이 처음으로 찾아갔던 아내에서 제일 크게 호되게 당하고 나서

그 이후 이어지는 장여사와 성아에게서 받는 상처가 더 커지는 것이 느껴졌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 외로 아내가 주는 상처가, 아내가 독고한에게 전달하는 원망과 분노가

첫 타자로서 약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사진출처 - 꾼들 페이스북 페이지>


본 리뷰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비전문적인 리뷰입니다.


날씨도 쌀쌀해지고 하니 따뜻한 연극이 필요하다고 느꼈을까.

꾼들 회장의 말처럼 '꾼들 공연에는 경찰과 도둑이 꼭 나온다더라"라는 속설을 깨고자

다른 공연을 선보인다길래 다녀왔다.


"니...밥 마이 묵으래이..."

"아빠, 내 오면 축구화 사줘. 새거?"


이 대사 두줄만 놓고 봤을 떄의 첫 인상은

내 스타일의 공연이 아닐 것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또한 가족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진부할 수도 있고

다소 신파적일 것 같은 주요 대사들이 포스터에 삽입되었다보니

크게 기대가 안되는 부분들이 었다.

특히 가족이라는 소재로 12년간 촬영된 영화 보이후드를 보고 난 직후여서일까.

"또 가족에 관한 내용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라는 제목은 답답했다.

눈먼 사람에게 길을 묻는 것만큼 바보같은 질문이 있을까?


공연 보러 가기 전부터 이래 저래 복잡한 마음을 안고 들어갔다.



월요일 첫날 첫 공연을 보고 왔다.

화요일이나 수요일은 시간이 안되서 못보나 싶었는데

뒤늦게 월요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보게 되었다.



앞에서 보러온 사람들에게 포스터를 한장씩 나누어 주었는데

포스터를 다 펼쳐진 상태에서 나눠줬다보니

관람객 입장에서는 포스터를 왜 나눠줄까 하는 의문을 받을 법했다.

실제로 뒷자리에 앉은 관객들은 "이거 방문앞에 붙여놓으면 되는건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니 포스터를 접어서 주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접어서 펼쳐보면 그나마 브로셔로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공연을 다 보고 나오면서 보니까 포스터를 돌돌 말아서 놨더라.

조금은 아쉽다.



무대는 디테일에 충실했다.

나무에 메달린 낙엽들에 옛날 집, 평상 그리고 그네.


집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 옆에 누군가의 졸업사진이 있었는데

보면서 드는 생각이 연출이 이문원교수님의 팬인가 싶었다.

교수님도 지난번 <민중의 적 : 2014>에서 교수님만의 작은 시그니처로

초등학교 졸업앨범 사진을 넣었는데

이것도 그것을 보고 넣은 것인가 싶었다.


<사진 출처 - 제22회 한동대학교 젊은연극제 출품작 집으로 페이스북 페이지>


극 말미에 세트 벽 뒤로 무대 앞과는 다른 공간을 투영한 것도

<집으로>의 느낌과 비슷했다.


<눈 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는 희극의 모습을 한 비극이라고 생각되었다.


소아암을 앓고 있는 선호,

그리고 어릴때 소아마비를 앓았는지 팔과 다리가 불편한 엄마 김붙들,

그리고 어릴 때 사고로 머리를 다쳐 글도 모르는 어눌한 아빠 이출식,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있고 불행한 이 가족을 보면서

답답함이 제일 컸다.


첫째는 목욕하다가 물에 빠져 죽고,

둘째는 암에 걸려 수술을 하더라도 생존의 가능성도 희박하고

그렇다고 해서 수술할 비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삶의 낙이라고는 없는 이 가정에도 낙은 있었다.


너무 바보 같아서 그렇지.

바보 아빠는 손톱깎아주고 발톱깎아주고 업어주고.

욕쟁이 엄마는 온갖 욕은 얻어먹으면서도 선호만큼은 지켜주려고 하는 마음.

각자가 할 수 있는 방법과 영역 내에서 최대한으로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큰엄마도 큰아빠도 이모도 악하다 손가락질 할 수 없는 것이

각자 처자식이 있으니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한 최대한으로 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은 이장과 목사겠다.


이장은 모든 것에 대한 공치사를 스스로에게 돌리고

또 그것도 모자라 공금을 스스로에게 돌리고자 노력하고 있고

목사는 말씀을 보자 기도하자 하지만 기도의 방향성이

사람이 아니라 그 외의 것을 향해 있다는 점을 문제점으로 볼 수 있겠다.


오죽 하면 목사의 대사 중에 이런 대사가 있지 않았겠나.


"쉿! 방금 어디서 개소리가 들리지 않았나요?"



극 끝에서 가족이 교회를 찾아가 기도하는데

의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아빠가 기도할 때마다 돈을 넣는데

아버지의 액자가 탁하고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아들의 모습을 아버지가 죽어서도 보기 싫은가 싶었다.


극 끝에 아버지가 약을 먹고 죽는 장면을 보면서

"자...어떻게 이제 극을 마무리 할까?"라고 생각이 드는순간

하우스 불이 켜졌다.


뭐지.

당황하기도 했고 뭔가 찝찝한 마무리.


내가 극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나?


나에게는 사투리도 잘 알아듣기 어렵거니와

욕이 계속 오고가는게 그렇게 웃긴 상황도 아니라서.

내 웃음 포인트와는 좀 달랐고,

옆에 앉은 여자 관객들이 훌쩍 거리며 보는 것과 다르게

내가 워낙 눈물이 없다보니

감동보다 답답함과 짜증이 더 많이 났던 것 같다.


그래도 극 중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꼽자면

'아픔'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이 수술받으러 가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농약을 먹었다는 아빠.

손톱을 깎아주다 너무 바짝 깎아서 아픔을 느낀 아들.

그리고 큰엄마에게 맞던 엄마.


아픔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래도 그 아픔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그나마 괴물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겠나.


사랑은 필연적으로 아픔을 동반한다.

아마 그 연결고리를 보여주고자 함이 아닐까.


많이 아프고 많이 사랑하자.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극 중 선호가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하는 대사

"아빠, 내 오면 축구화 사줘. 새거?"

어쩌면 앞에서 계속해서 감동을 주다가

펑! 터뜨려줘야 되는 대사가 아닐까 싶었는데

그냥 흘러가버린 것만 같았다.


음향 실수가 몇번 있었긴 한데

전화를 받았는데 뒤에서 계속 희미하게 전화벨이 울려

소오름


관객 수가 적어서인지

이장 방송 때와 막과 막 사이 음악 음향이 너무 커서 귀가 아플 정도


<사진출처 : C바이러스 페이스북>


<2014.10.03 19시 공연>


주말 사이에 서울에 올라가

<민중의 적:2014>를 보러갔다.

보러 가기 전에 내심 걱정했던 부분은

'밀양 송전탑'이라는 주제는 1년이 넘도록 진전이 없었기에

과연 시의성이 적절한가 싶기도 했다.

또한 '세월호'로 인해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마음의 짐이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


극단 C바이러스의 이번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

연출이신 이문원교수님의 이전 작품들을 볼 때

다소 의외라는 생각을 했었다.


현재 안식년을 가지고 계신 교수님은

이번 작품 이전에 한동대학교에서 <레미제라블 4.19>로

그리고 <집으로>를 보며 별개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보았다.


특히 작년부터 시작해서 그때 당시 한동대학교가 처한 상황

그리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을

작품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혁명'을 노래한 <레미제라블 4:19>이후

"난 집으로 가고 싶어..집으로"라고 말하는 <집으로>를 보며

더 이상의 혁명도 노래도 없는 오로지 '하늘바라기'가 되나 싶었다.


처음 <민중의 적:2014>의 제작소식을 들었을 때

"과연 교수님이다" 싶을 정도로

도전적인 주제로 작품을 만드시는구나 생각했다.


<사진출처 : C바이러스 페이스북>


헨릭 입센의 <민중의 적>의 형태로

밀양의 옷을 입혀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싶었다.


연극을 보고나서 이 리뷰를 쓸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다른 작품도 아닌 교수님의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워낙 어려웠기도 하고 부족한 내가 리뷰를 씀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연극에 대해 감상하는 것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 젊은 날에 연극을 보고

느낀점을 기록하는 것의 소중함을 잘 알기에

내 이기심의 승리로 본 리뷰를 작성한다.


<사진출처 : C바이러스 페이스북>


C바이러스의 구성은 흥미롭다.

부부가 함께하는 극단.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끊임없이 새로운 배우들이 오고 가고

또 기존의 배우들에게 새로운 옷을 입혀주고

마치 자녀를 키우는 것처럼

극단을 키워가시는 두분을 보면서

C바이러스에 대한 애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사진출처 : C바이러스 페이스북>


이번 작품을 보러가면서

기대가 되었던 점은

졸업생 두분이

그것도 2007년에 <멕베스: 돌이킬 수 없는>을 끝으로

보지 못했던 선배를 무대위에서 다시 볼 수 있어서

뜻 깊은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민중의 적:2014>이 하는 '천공의 성 소극장'은

혜화역 4번출구로 나와서

베스킨라빈스 쪽 골목으로 향하다가 보면

찾을 수 있었다.



극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배우들이 얼마 안 있어서 나와서

무대안에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일리아드>때도 그랬고,

반갑다는 느낌이 크다.


개인 기록용 티켓 인증 사진


<사진출처 : C바이러스 페이스북>


<민중의적:2014>를 보면서 소극장이지만

소극장에 있기 아까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학교에서 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송전탑'이라는 소재는 새내기 학생들에게 생소할지는 몰라도

몇년 전에 잠깐 '반짝' 했던 적이 있다.



이렇게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한동신문 [170호 송전탑 특집] 흥해 분기 송전탑 건설, 한동의 반응을 보다

학내 학보사로도 기사가 났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고

학교 주변에는 송전탑들이 들어서있다.


그렇기에 결코 우리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서

<민중의적:2014>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사진출처 : C바이러스 페이스북>


<민중의적:2014>는 화려한 무대 장치가 있던 것도 아니였고

오히려 단순했지만 정말 꽉찬 무대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 그리드로 무대가 가득 채워지면서

배우들이 인터넷의 댓글들을 표현하는 장면 또한

"역시..."라는 감탄사를 자아냈다.


배우들의 캐릭터 한명한명이

정말 살아있었고

말을 했고 움직였다.


특히 한 장면에서 배우들이 관객석에 앉아

'성도일'에게 온갖 욕을 하는 장면에서는

그토록 불편한 관객석이 아닐수가 없었다.


관객석에 섞여있는 배우들의 입으로


"내려오라고"

"뭔 소리야"


우리의 생각들이 나오고 있었고

우리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앉아있는 그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


또한 언론이 자본주의에 넘어가고

결국 진실을 은폐하는 것에서는 답답함과 안타까움

오히려 무기력함을 느꼈다.

언론에 대해 별다른 희망을 가지고 있지않은

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전에 페이스북에


한동대학교에 총학생회는 필요하지 않다.

제대로 작동되는 언론이 필요할 뿐이다.


라고 썼다가 급히 비공개로 바꿨다.

내 생각에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거니와

내 생각은 내 생각으로만 존재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현재 총학생회를 하고 있는 몇몇 페이스북 친구들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매우 극단적인 생각이기도 헀으니까.

언론은 눈이지 결코 손과 발이 되지 못하니까.


현재의 한동대학교에는 제대로된 언론이 없다.

그나마 최근에 들어서는 '한동신문사'가 그나마

조금 괜찮은 기사들을 쓰고 있지,

이전에는 정말 별볼일 없었다.


또한, 소위 '찌라시'가 불리우는 '당나귀'의 존재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사진출처 : C바이러스 페이스북>


잠시, 이야기의 흐름이 한동대학교로 갔지만

다시 <민중의적:2014>로 돌아와서..


<민중의적:2014>의 마지막 장면 중에

'침묵'의 장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무서운 '침묵'


무너져가기 직전의 '침묵'은 너무나도 공포스러웠고 길었다.


'성도일' 캐릭터를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조심해야 되는 사람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상처 입은 맹수'는 건들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말하는 자가 곧 적이 된다는 것을.

침묵하는 자는 아군이라는 것을.


그리고 결국 극의 끝부분에서

'하늘을 보라'며 할매는 말한다.


답을 원하는 시대

답을 갈망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답은 오로지 '하늘을 보라' 밖에 없는 것일까.




이 극이 단 몇일만으로 무대 위에 올랐다가 사라지기에는 아까운 것 같다.

물론 이 리뷰도 너무나도 부족하고

<민중의적:2014>를 보며 내가 느꼈던 모든 것을 담아내기에도

너무나도 부족했다.


아쉽다...


[Λ] "웃어라 무덤아"

2014. 10. 1. 02:37



2014.09.30

9월의 마지막날을 연극으로 마무리를 했다.

9월을 보내면서 본 연극은 가벼울법도 하건만

오히려 가벼움 보다는 중후한 세월의 무게와

고독이라는 길을 보여주었다.



#STAGE#


무대는 크게 특이한 것은 없었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밋밋하리만큼 심플했다.

배우들 대부분은 전면의 의자와

무대 오른쪽의 아랫쪽을 사용하면서

다소 단조로운 무대 사용을 보였다.


특히 무대 가운데에 의자를 배치한 것이

너무 '정직했다'라는 느낌이 컸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의자를 의자 이상의 

프롭으로 사용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지만

극 결말 부분의 꽃을 꽂는 부분 외에는

크게 새로운 부분이 없었다.


특히 무대 좌측의 빨래가 걸린 빨랫줄은

오히려 배우들의 등퇴장에 걸리적거리는 요소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


무대의 전환 시 가운데에 있는 무대를 옴겨서

감옥으로 순식간에 전환한 것은

일단 칭찬하고 싶다.


맨 앞에서 극을 본 바,

나무판 전체를 어둠 속에서 옴기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다만 유치장이라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조명의 시도를 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유치장의 분위기를 한층 살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배경외에는 유치장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 부족한 느낌을 조명으로 보충해주면 어떻겠나 싶었다.


또한 유치장의 창살을 붙잡고 있는 배우

그리고 대부분 무대 좌측으로 앉아있는 배우

그리고 가운데에 밀집해있는 배우

지나치게 운집해있는 배우들로 인해

소녀가 잠시 등장했을 때 소녀에 대한 관찰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앞에 앉아서 일지도 모른다)


#ACTING#


배우들이 대부분 앉아있거나

그냥 서서 대사를 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최소한의 움직임 그리고 할머니 특유의 몸짓을 연기하던

할머니 역할의 배우가 더 생동감있게 느껴졌다.


'강옥자' 캐릭터 연기하는 친구가

언제나오나 싶을 정도로 계속 기다려졌다.


'정말자'를 연기한 배우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느낌이었다.

울고 있으나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어서

그래서 더 극의 끝에가서는 더 기괴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특히 '강옥자'의 죽음 이후 100만원을 놓고

사람들이 계속해서 본연의 모습이 하나둘씩 나오는 장면은

내게 마치 폭행당하는 느낌을 주었다.



특히 이전에 니콜 키드먼이 출연했던 <Dogville>처럼

배우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분 선 너머로

관객들에게 보이는 많은 폭행과 부조리가 있었음을 보고

엄청난 스트레스였는데

이 작품 또한 100만원을 놓고 벌여지는

수 많은 인간들의 추악함을 보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탁기봉'캐릭터는 남자라면 아마

도전해보고 싶은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

'음흉' '음란' 수위높은 상상자극 대사들을 하는 것에 있어서

조금 더 뻔뻔하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좀 남는듯 싶었다.

아마도 '탁기봉'캐릭터를 능숙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사람이 생각나서 아쉬움이 느껴진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배준후 평론가)


'순경' 역시 '똘똘이'와 '딸딸딸'을 자신이 말하면서도

순진한 듯이 말했다면 더 웃겼을 것 같지만,

자신이 말하면서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는 느낌에

다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 전반적으로 사투리를 많이 썼는데

어떤 사람은 사투리를 쓰고, 어떤 사람은 서울말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사투리를 듣는 것이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사투리에 100% 이입하지 못했다.



브로셔의 담당교수의 글을 보며

단연 눈에 들어오는

'고독'이라는 키워드


우리의 삶 뿐만 아니라

무대 위에 오르는 순간 만큼은

그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뜨거운 조명 아래의 고독한 시간을 이겨낸 배우들과

동분서주하며 극을 준비했을 스태프들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여행길'을 시작하는

'고독'의 참된 의미를 아는 청춘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독'안에서도 웃을 수 있는 날이 그대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찾아오기를.



지난번에 한동대학교의 <집으로>를 보러 다녀왔었다.


그때 연극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을 때

느낌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무엇이 바빴는지 미뤄두고 정리를 못했다.


그때 당시 작품을 통해 내게 크게 각인이 된 감정은


"의아함"으로 기억한다.


아마 지난학기 했던 <레미제라블 4.19>와

대비되는 느낌의 작품이라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혁명을 노래하던 레미제라블에서

"집으로 가고 싶어..집으로"라고 말하며 끝을 맺는 연극은

마치 '혁명'의 끝과 같았다.


더 이상의 혁명은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만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는 교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신데 하면서도

이제 교수님도 포기를 하신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였나보다.


사진 출처 : https://www.facebook.com/cvirus09


이번에 교수님이 하시는 극단 C바이러스에서

밀양 송전탑을 소재로 해서 <민중의 적>을 하시니 말이다.


혁명에 대한 불씨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나보다.

<집으로>이후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교수님만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혁명을 꿈꾸는 것을 보면

본받을 점이 많은 것 같다.





2014.9.19

학교에서 후배들이 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극을 보고 왔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은

해소되지 않은 성적 욕망을 그리고

인간이 가진 불안한 감정,

그리고 기구한 인생의 등장인물들을 사용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테네시 윌리엄스는 동성애자로

누구보다 '욕망'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하고

이 작품을 쓰지 않았나 추측해보았다.


인터넷에 떠 도는 동성애자 관련된 글에서

동성애자들에게는 성욕과 식욕을

동일선상에서 바라보고 

"동성애자들에게는 각자가 선호하는 식욕이 있다" 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 마찬가지로

자신의 식욕에 대한 이해와 관찰을 통해

스텔라, 스탠리, 미치, 블랑쉬와 같은

자신을 투영하는 모습들의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자신의 과거의 모습

그리고 현재의 모습

주변 사람들의 동성애자들을 향한 반응


이 작품을 보는 사람이라면, 난해하다고 할 수도 있고.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보면서 세부적인 디테일에 집중하면서

대사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본다면

그리 재미 없는 극도 아니고

오히려 더 깊은 생각을 하게끔 해주는 극이었다.



블랑쉬는 마치 Great Expectations에서

Gillian Anderson이 연기한 Miss Havisham과



Helena Bonham Carter가 연기했던

Miss Havisham 중간의 느낌이랄까.


과거와 현실 사이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움을 표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특히 첫 장면에서 흰 옷을 입고 나타나

어두운 세트장을 밝혀주는 듯했지만,


블랑쉬 뒤브와

'하얀 숲'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무성하게 자라버린 검은 숲과도 같은 블랑쉬의 모습에

이미 돌이켜버릴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밤에 야식이 먹고 싶은 이유는

배고픔에 대한 이유보다

그것이 하나의 습관처럼 바뀌어버려서

먹지 않고서는 허전함의 욕망에 사로잡혀서가 아닌가.


그녀가 수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녀의 애정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반복되던 것이었다.


스탠리와 스텔라는

서로에 대한 탐닉이 극에 달한 인물들이었다.


끼리끼리 만난다고 했던가.

스탠리의 격한 모습을 사랑하고,

스텔라 또한 그 격한 모습을 즐기고 수용한다.


블랑쉬는 현실을 도피하는 캐릭터라면

스텔라는 현실을 수용하는

대비되는 캐릭터였다.



블랑쉬에게 미치라는 관심을 표하는 한 남자가 생겼을 때도

블랑쉬는 여전히 과거의 잔재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계속해서 음악이 들리고 고양이 소리가 들리는 등

과거는 그녀를 끊임없이 쫓아다녔고,

그녀는 그 과거를 두려워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과거를 잊기위해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계속해서 달리는 것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극중에서는 남자 캐릭터는 '현실적'인 캐릭터로 비춰진다.

스탠리뿐만 아니라 미치도.


과거라는 것은 항상 우리를 쫓아오지만,

100% 자신있게 담담히 마주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블랑쉬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과거를

미치도 블랑쉬의 과거를 수용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그녀는 정신병원에 과거와 함께 갇쳐버리게 된다.


우리의 과거가

그리고 우리의 감정이란 것이

결국에는 욕망의 표출에 불과한 것인지


그리고 그 욕망에 의해 우리가 가는 종착점은

고립과 과대망상인 것인지


사랑

욕망

도대체 무엇이냐.



기존의 104호 공연 무대에서

다양하게 무대를 활용하려고

무대 제작을 창의적으로 했다는 것에서

인상이 깊었다.


배우들은 전반적으로 잘 했지만,

다만, 남자 배우들의 에너지에 비해

여자 배우들이 가진 에너지가 워낙 크다보니까

남자 배우들이 밀리는 기분이 들었다.


스탠리 같은 경우에는 계속해서 비슷한 모습이

다소 단조로워 보였다.

애초에 무식하고 욕망뿐인 캐릭터에게서

복잡함을 기대하면 안되겠지만.





벌써 7년전 했던 연극을 회상하면서 글을 남기려니 

참 기분이 묘한 것 같다.

 

한동대학교 제15회 젊은연극제 참가작 멕베스:돌이킬수없는, 

이 연극으로 인해 나의 삶 전체 방향이 다 바뀌었다.


처음에 생명과학부를 가려던 나였는데, 

1학년때 기획팀이라는 글에 끌려

나도 모르게 지원하고 한 학기,

그리고 방학까지 세종대학교 극장에서 보냈던 시간들.

그때 정말 미쳐있었나 싶다.

 

학관 104호에서 연습하던 때, 

매 시간마다 찾아가서 연습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했다.

그때 왠만한 배우들 대사는

정말 다 외웠던 것 같다.

 

꼭 할일이 있어서 간 것은 아니었고,

뒷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과제를 하더라도 

그냥 뒤에서 앉아서 가끔 구경하는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지금은 기획팀이 의무적으로

1주일에 몇번으로 연습참여를 

하도록 하는 것을 보면

예전과는 많이 다른 것을 느낀다.

 

그때 기획팀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형 그리고 누나들이 시키는 것만 했고, 

그래도 이것저것 아이디어들을 내고

그 아이디어들이 채택되었을때의 즐거움이

제일 컸던 것 같다.



지금의 학관 104호는 많이 바뀌었지만,

옛날에는 104호가 이랬었다.

이곳에서 수업도 햇었고,

예전에 여기서 드라마 작법 기초 과목까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이중문과 검은 벽은 없고

흰벽이 가장 크게 다르다.

그리고 사진에는 없지만, 이때의 의자는 나무의자였다.

지금처럼 푹신한 의자는 아니었다.

공연 때 앞무대를 늘리기 위해

맨 앞 의자 한두줄은 볼트를 풀어서 밖으로 날랐던 기억도 난다.

엄청 무거웠다. 

 


교수님께서 사진 과제를 내주셨던 때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지금보면 상당히 낯이 익은 모습이다.

마치 지난번 한여름밤의 꿈 때 마리오네트 장면 같지 않은가..?

 


그때 마녀와 마남(?) 분장이다.

그때 분장이 영롱이였는데,

참 멋지게 잘 해주었다.

이떄 영롱이를 처음 알게 되었구나. 그렇고보니.



무대는 정말 멋졌다. 뒤에 백드랍

그리고 바닥에는 마법진을 연상시키는 페인팅까지.

멕베스 연극의 시작은 배우들이 나와

무대인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였다.

무대인사를 하고 리와인드를 하며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식이었다.


마치 영화 메멘토를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때 당시 연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도 매우 생소한 방식의 연극이였다.



많은 장면들 중에 기억에 남는 장면,

멕베스 부인이 피에 물든 손을 보며 씻으려고 하는 장면.



마녀들이 멕베스에게 힘을 불어넣고 매혹하는 장면.

과연 멕베스는 자신의 의지대로 뱅코우와 덩컨왕을 죽인것일까.



마녀들의 움직임과 조명 그리고 멕베스의 표정

모든 것이 정말 멋졌던 부분이었다.




벌써 7년전 작품이 되었다.

연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게

공연계의 첫발을 내딛게 해주었던 작품이다.

학교에 돌아와 연극개론 수업 때 그때 했던 공연의 영상이 남아있어

수업 자료로 쓰이는 것을 보고 묘한 느낌이 들었다.

 

공연은 그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지만,

공연을 보러오는 관객들에게,

그리고 공연이 끝난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것에서

진정한 끝이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공연은 막이 내려도 항상 현재 진행형인 것 같다.

 

끝으로.

못찾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렵사리 구할 수 있었다.

 

 

한동대학교 제15회 젊은연극제 참가작 멕베스:돌이킬수없는 홍보영상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