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승기교수



강연을 가기 전에 

며칠 전 샀던 신발을 환불하러 

현대백화점 천호점에 갔다.

 

항상 살때는 이쁜데 막상 집에와서 보면 별로인.

백화점 이펙트일까.

 

요즘 날도 풀리고 꽃도 만개했고 더워지고 있다.

 

 항상 여름만 되면 빙수로 여름을 버티는데

 이번에는 좀 이른 빙수를 시작. 

 

현대백화점 천호점에도 밀탑이 생겼다고 해서.

 

가격이 오른듯? 

7000원대였던걸로 기억하는데

8000원이었다.

맛있긴 한데, 

요즘에는 빙수 밀탑처럼 만드는 곳이 많아져서.

앞으로 계속 갈지는 미지수.



이번 <두산인문극장 : 불신시대> 두번째 강의는 

민승기교수님의 

'오! 나의 친구여 친구란 없다' 라는 주제로 시작되었다.



민승기교수님은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이시며, 

해체론, 정신분석, 그리고 데리다와 라깡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렇다보니 강의의 제목 또한 

데리다의 저서 <우정의 정치학>에서 분석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 나의 친구여 친구란 없다'이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대주제의 첫 강연으로

 '우정'이라는 이름의 '사랑'에 대한 강연이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라는 개념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개념과는 다르다.



'두개의 몸'에 존재하는 한개의 영혼.

교수님께서 강의 때 말씀하신 '겹침'이라는 것일까.

'사랑'하면 필수적으로 생기는 '겹침'


르네 마그리트 '거대한 나날' 1928

 

르네 마그리트는 자웅동체를 그렸지만, 

남녀 사이에서 겹침의 지점, 즉 '혼돈'이 존재한다는 것.

 

교수님은 강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파울 첼란의 시를 읽어주셨다.

 

그것은 하나의 울림.

그것은 진리 자체가 인간들 가운데로 오는 것.

은유의 눈보라 가운데로.

 

그렇다면 '사랑=울림' 인가?

 

매 강의가 지속될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보다는 단순해지는 것 같다.

어려운 주제일지라도 답은 하나.

 

아카페, 필로스, 그리고 에로스.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한다.

부모와 자녀 그리고  친구사이의 사랑은 필로스.

본능 그리고 낭만의 사랑 에로스.

 

틈이 없고 차이가 없는 것은 에로스.

극복할 수 없는 거리를 가진 것은 필로스.

내제 되어 있지만, 틈을 가지고 있는 아가페.

 

사랑이 이토록 어렵던가.

교수님께서도 말하셨다. 

해체론은 간단한 것도 어렵게 한다고.



필로스는 사랑의 대상이 살아있음에도 

부제를 염두에 둔다고 했다.

온전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언젠가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 

죽음이 있을 수도 있기에.

하지만 그 거리로 인해 사랑이 유지되는 것이기도 하다.



에로스는 마치 E.T처럼.

연결되어있어야 한다.



아가페는 다르다. 

내 안에 있어야 존재한다. 

나를 벗어나고는 살 수가 없다.

나 또한 살 수 없다.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포옹이다.

포옹을 했을 때 겹치는 부분이 있다.

이곳은 남아도는 부분이기도 하면서 

제3의 공간이 되어버린다.

철학은 심리학 부터 신화까지 

많은 영역을 두루 알아야 되는 것 같다.

'포옹'에서도 신화를 차용해서 설명하는 것을 듣고.

 

들으면 들을수록 

인문학이 얼마나 성경적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제우스가 인간을 반으로 가르고.

우리가 죄로 인해 분리되고.

아담으로부터 분리되어 여자가 생기고.

또 다시 붙고.

아프로디테와 헤파이스토스의 이야기를 통해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

 

다시 제목으로 돌아와서,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

 

미래와 과거의 친구 모두를 포함해서 

그 존재를 無로 돌려버리는.

결코 화합할 수 없는 간극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는게 불편한 것이다.

'겹침' 이 불편한 것.

 

'겹침'은 차이가 아닌 

동질성을 갖춘 것이 부딫이는 것이므로

잉여물이 생긴다.

사랑의 메아리.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잉여물이 사랑인가?

 

도대체 사랑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친밀한 것들이 낯설 때, 

리는 사랑했나?



'난 널 사랑해'

결국 이 말도 누군가가 했던  말이다.

그 사람의 '사랑해' 와 나의 '사랑해'는 동일한가?

'나' 만의 사랑은 없다.

다만 이미 오염되어버린 변질된 말의 되풀이인가.

그렇다면 기계적인 반복이 

인간적인 사랑을 만들 수 있다고 봐도 무관한가.

 

언어가 사랑을 발생시키는가?


과연 순수한 사랑이 있을까?


교수님께서 롤랑 바르트가 했던 말을 인용해주셨다.


' 난 널 사랑해' 

이 말은 우리 매일매일 다시 시작하자를 확인하는 말이라고.


'사랑'이 매일매일 확인해야하는 

영원히 매꿔지지 않을 틈이었나.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하지 않은가?

적어도 신앙에서 나를 점검할 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삶이 연극을 모방하는가?

연극이 삶을 모방하는가?

 

이 질문에 혼란이 왔다. 

극 안에서의 삶을 꿈꾸지 않는가. 

영화, 연극 이러한 것들이 

현실에서 못보는 것들의 대리만족이 아닌가.

그렇다면 삶이 연극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가?

 


<우정>

 

"나는 너의 친구야"는 틈을 제공한다.

조르지오 아감벤의 강연문 '친구' 에서 그는

친구라는 말은 서술어가 아니며 

정의할 수 없는 단어라 하였다고 한다. 

내가 정의를 채워넣을 수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곳이 친구.


한창홍 '1994년의 사랑' 1994

 

장 뤽 낭시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다. 

비록 사랑에 대해 많이 이루어졌지만


사랑은 마치 내 속에 찔러 넣어진 칼 같다고 했다.

사랑은 조각난 상태로만 존재하고

칼은 나를 죽일수도, 

하지만 간직하면 칼은 꽂은 채로 살아있게.

불가능한 것을 품고 있는 것이 사랑.

 

"한번의 키스가 존재에 균열을 낸다"

 

틈.

균열.

 

사랑이 있긴 한걸까.

그냥 마치 끝없는 크레바스에 빠진 기분이다.



우리 시대의 친구는 

실시간 메시지 주고 받기 

그리고 네트워크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계산이 가능하다.

숫자로 바꿀 수 있다.

숫자로 할 수 있는게 과연 친구인가?


 

너무 어려운 주제의 강의였고, 

사실 내가 정리하면서도 잘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많았다.

내가 이해하는 선에서 최대한 적어보았고,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복잡한 내용이지만, 

답은 계속해서 하나라는 점이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가 사는 것.

모든게 다 아가페, 참 사랑으로 직결되더라.

 

오 나의 사랑 사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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