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교수



이번에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에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의 마지막 강의로

서동진 교수의 

<사랑에 관한 질문들>이라는 강의가 진행되었다.

 

이날 전공 교수님의 부친상으로

참여할 수가 없었지만, 

뒤늦게 녹음된 것으로 들어보고 정리해볼 수 있었다.


<사진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8573>

 

강연 녹화를 들으면서 실제 강연 사진보다 

이 기사에서 나타난 사진이 이 사람을 표현하고 

느껴지는 그대로 나타냈다고 생각해서 

제일 처음으로 올리게 되었다.

딱딱한 강의자리가 아닌 

술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해야 될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교수이다.

 

그리고 강의에서 느껴지는 것은

진보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공격적인 진보는 아니었다는 생각.

 

그렇다고 해서 마냥 편한 강의 내용도 아니었다.

 

혁명 그리고 사랑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Les Miserables

생각이 많이 났다.



서동진 교수는 '사랑'이라는 주제는

이렇게 많은 청중들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닌

3~4명과 함께 은밀한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을 매우 신성하게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어쩔 수 없이 믿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 내밀하게 이미 믿고 있으면서도,

또 더 이상 믿을 가치가 없다고 

체념적으로 부인하는 것.

 

그가 정의하는 사랑은 위와 같았다.

불신의 대상임과 동시에 신뢰의 대상이며, 

역설적인 대상이 사랑이었다.

 

사랑은 이성적으로는 풀수가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성은 사랑과 함께 사는 날이 거의 없다지

- 셰익스피어 [한 여름밤의 꿈] -

 

한 여름밤의 꿈 대사라니..!

 

한글 번역한 대사보다는 

영어가 느낌을 더 잘 살리기에.

 

아마 저 대사는

And yet, to say the truth, 

reason and love keep 

little company together nowadays

이것이지 않을까 싶다.

 

보텀의 대사 중에

가장 '이성적'인 대사가 아닌가.

 

위 말을 교수가 인용했을 때,

얼마전에 내가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포스팅 했던 것이 생각났다.


<사진 출처 : facebook.com/lovedcause>

 

이처럼 이성을 잠시 외출하게 만드는 사랑을

오늘날에는 이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그리고 화학적으로 분석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사랑에 대해 해부를 하고,

사랑에 대한 결과물로 알약 몇알을 먹고

사랑에서 오는 고통조차 약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것들이 과학적으로 풀이가 가능하며,

과학 지식이 정복 못할 것이 없는 것일까?



위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다.

편할지는 모른다.

다만 불편과 노력을 배제한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아프게 고민하는 이 시간의 무게가

가벼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행복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었다면 

행복이라 불리지는 않을 것이다.

 

"카페인이 없는 커피를 마시는 것"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이상이었다.

커피맛을 보고 싶어하지만, 부작용이 있다.

그러한 부작용이 제거되어있기를 원한다.

 

심지어는 섹스조차, 적절한 쾌락만을 쫓는다.

 

군더더기 없는 사랑,

불편 없는 사랑,

 

이 실체가 없는 모호한 '사랑'을 설명하고 정의하고자 

교수는 영화 4편에서 나온 인물들을 통해 

'사랑'을 설명하고자 했다.



첫번째 영화는 <노예 12년> 감독 스티브 맥퀸이 

2011년 제작한 <Shame>이라는 영화다.

교수는 이 영화를 "거지같다"라고 표현했다.

 

영화 속 주인공 Brandon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소모한다.

섹스를 통해서.

오르가즘이 아닌 그저 

자기 자신을 분출하고 소모하는데에

 

공허

허무

분노

좌절

 

영화 끝에 그는 진실된 사랑을 찾아 떠난다.

하지만 그 끝에서도 그는 분출을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가 이 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의 섹스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교수가 "거지같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변할게 없다는 것을 알아서 였지 않을까.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대다수의 평은 1번 보고 

다시는 또 보기 힘든 영화라고 하였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 밑에 

밑바닥을 보여주어서가 아닐까.



오늘날 모든 심리적 문제의 해결을 

의사들은 신경 전달물질에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항우울제를 처방한다.

모든 종류의 심적 고통은 

프로작과 같은 알약으로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랑으로 인한 공허도.



언젠가는 마치 상비약처럼 될지도.

영화 <Equilibrium>의 사람들이

매순간마다 자발적으로 주사하는 것처럼.



교수는 사랑이 과학에 의해 정복된 시대에서

사랑이 희박해진 시대에서

어떻게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세상이 

"거지같다" 

"다 쓰레기다"

표현을 여과없이 말하였다.

 

'사랑'

'혁명'

 

그가 중요시 여기는 이 두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고 동시에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랑 = 혁명

둘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혁명은 현재의 세계와 다른 세계에 도달하게끔 한다.

우리가 거듭나는 경우를 느끼게 하는 것은 

사랑에 빠졌을 때이다.

 

개인의 변화는 사랑

세계의 변화는 혁명

 

사랑과 혁명

두가지는 관계맺음이 수반되기 때문에,

닮은 꼴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청중에게 세개의 질문을 던졌다.

 

1. 진실이란 있는가?

2. 필연성이란 있는가?

3. 보편성이란 있는가?

 

오늘날에는 매칭 서비스 '듀오' 처럼 

사랑이 서비스가 되어버린 시대인데,

이 세가지 질문에 답변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는 사랑이 비록 인기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오늘날이지만,

사랑을 탐구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사랑의 윤리학'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파이란>을 그는 소개했다.

 

여기서 그는 멜로 영화의 어려움을 잠시 이야기하였다.

로맨틱코미디가 아닌 

'사랑의 보편성'을 다뤄야하는 

멜로 영화의 어려움에 대해.

 

이 영화는 언어에 대해 논란을 가져온다고 하였다.

언어 & 사랑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를.

 

"너를 사랑해"

 

이 말은 모든 것을 바꾸고 얼려버리는 말이라고 하였다.

친구가 '사랑'이라는 단어로 인해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람

더 없이 불편하거나

더 없이 황홀하거나

미쳐버리게 된다.

 

이 언어의 힘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영화 <파이란>

 

사랑이 선언되었다.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나일 수가 없다.

나에게 선언된 그 사랑이라는 말을 떠맡기 위하여

나는 모든 공리적인 욕구를 포기할 수 있다.

사랑을 위해 내게 약속된 

쾌적하고 안락한 삶을 기꺼이 양보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이 나에게 죽음을 요구할 지라도 말이다.

 

배우 최민식이 연기했던 '강재'가 그런 사람이었다.

 

오늘도 호구

내일도 호구

영원한 국가대표 호구

 

그의 삶은 선언으로 인해 바뀌었다.

 

한 여인의 무책임할 수도 있는 

죽기 전의 마지막 말이 그를 바꿔놓았다.

 

강재씨, 당신에게 줄 수 없는 것, 

아무것도 없어서 죄송합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사랑하는 강재씨 안녕

 

이러한 일회성,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건은

'선언'으로 인해 발발했다.

예고된 것이 아닌 우발적이기에,

필연적이라고 하는 것.

 

'사랑'은 또한 시간에 구속되어있지 않다.

우리가 사랑한다 말할 때,

"3년간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영원히 사랑해"

사랑은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



3번째 영화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였다.

내가 이 책을 중학생 때 읽어서 내용은 가물가물했지만,

사춘기 시절 혼란만 주었던 책이었다.

 

프란체스카는 여기서 자신이 

굳게 사랑했다고 믿고 있다.

사랑에는 수 많은 이유는 열거할 수 있으나

그 원인을 정의할 수는 없다.

 

우리는 너무나 원인을 알고 싶어하지만,

원인은 찾을 수 없다.

 

"왜 나를 사랑해?"

 

이 질문에 그 어떤 답변도 이유가 될 뿐,

사랑의 근본적 원인을  밝히지 못한다.

그저 동업반복적인 "사랑하니까"라는 답변 밖에는.

 

원인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교수가 말했다.

 

교수의 예시에서 

요즘 <세월호 침몰 사건>이 생각이 많이 났다.

 

오늘날 많은 이유는 존재하나

원인은 없다.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음모론"

"Conspiracy Theory"

 

위와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발생한다고.

원인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원인을 찾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이유에 불과하고

이로 인해 투쟁의 부재를 가져온다.

투쟁이 부재가 곧 음모론으로 연결되며,

소문을 만들어내고

이를 두려워하거나 즐기거나 한다고.

 

오늘날 사랑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서

이유만 난무하고 

원인을 찾으려고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지막 영화로 그는 <Amour>를 꼽았다.

 

'윤리'와 '사랑'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이 영화를 

그는 '공감'이라는 요소와 함께 설명을 하려고 하였다.

 

'공감'은 차별성을 배제시키고

오로지 1인만 있다는 가정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살면서 자주 듣는 "고객님"이라는 호칭도

모든 손님이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개별성을 배제하고 대한다는 것.

 

영화에서 조르주는 아내에게 '공감'하면 할 수록

죽여달라는 아내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끝에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이 

기독교 신학에 관심을 많이 가진다고 그는 말했다.

특히 '바울'에 대해.

 

십계명 중에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웃을 '바뀔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특히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을 했는데,

예를 들어 필리핀 이주 여성이 있는데,

레이디 가가를 좋아하고, 빅맥을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오면 

생전 처음 입는 전통옷과

 필리핀 전통 음식을 요리하게 하는

괴물과도 같은 프레임을 강제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관용과 배려가 용납이 안되는 곳에서 

적용되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교수가 생각하는 

삶의 보편적 원리를 맺는 말로 말해주었다.


사랑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

필연적으로 기꺼이 승인하는 것.

전혀 다른 존재를 형성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창립하는 것.

 

교수는 사랑에 대해 보편성을 끄집어 내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 했다.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질문이 주어질 때, 

심각하게 동요하고 생각을 바꾼다.

특히 사랑에 대해 실패할 때 마다 

그런 것은 없고 내가 속았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에 대해 좌절할 때,

우리가 알던 사랑에 대해 거부한다.

 

오늘날 불신의 시대라는 것은,

진정으로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 지적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고, 혁명을 믿지 않는다.


Q&A 시간에 추가적으로 이야기했던 점에서는

교수는 무언가를 믿고 있는 것만큼 

추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특히 열성 기독교도를 '몰상식'하다고 말했다.


변화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위해 

믿음의 대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믿음이라는 핑계거리를 생산해낸다고.


그는 이 변화에서 믿음의 대상이

근본주의적인 종교로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통해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하였다.


강의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인 혹은 보수 성향을 가진 사람이 듣기에는

불편한 자리였다.


하지만 십계명 처럼 그도 "이웃"이며

자신이 정의한 것처럼 "바뀔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의 혁명은 없다고 말하는 그.


이제 남은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마저도 퇴색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그는 갈수록 말할 것이 없는 

Les Miserables 라고 느껴졌다.


 

그의 표현을 빌어 

추한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처럼, 남아있는 것이 사랑뿐이라면,

그 사랑은.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 1 John 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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