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2014.9.19

학교에서 후배들이 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극을 보고 왔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은

해소되지 않은 성적 욕망을 그리고

인간이 가진 불안한 감정,

그리고 기구한 인생의 등장인물들을 사용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테네시 윌리엄스는 동성애자로

누구보다 '욕망'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하고

이 작품을 쓰지 않았나 추측해보았다.


인터넷에 떠 도는 동성애자 관련된 글에서

동성애자들에게는 성욕과 식욕을

동일선상에서 바라보고 

"동성애자들에게는 각자가 선호하는 식욕이 있다" 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 마찬가지로

자신의 식욕에 대한 이해와 관찰을 통해

스텔라, 스탠리, 미치, 블랑쉬와 같은

자신을 투영하는 모습들의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자신의 과거의 모습

그리고 현재의 모습

주변 사람들의 동성애자들을 향한 반응


이 작품을 보는 사람이라면, 난해하다고 할 수도 있고.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보면서 세부적인 디테일에 집중하면서

대사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본다면

그리 재미 없는 극도 아니고

오히려 더 깊은 생각을 하게끔 해주는 극이었다.



블랑쉬는 마치 Great Expectations에서

Gillian Anderson이 연기한 Miss Havisham과



Helena Bonham Carter가 연기했던

Miss Havisham 중간의 느낌이랄까.


과거와 현실 사이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움을 표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특히 첫 장면에서 흰 옷을 입고 나타나

어두운 세트장을 밝혀주는 듯했지만,


블랑쉬 뒤브와

'하얀 숲'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무성하게 자라버린 검은 숲과도 같은 블랑쉬의 모습에

이미 돌이켜버릴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밤에 야식이 먹고 싶은 이유는

배고픔에 대한 이유보다

그것이 하나의 습관처럼 바뀌어버려서

먹지 않고서는 허전함의 욕망에 사로잡혀서가 아닌가.


그녀가 수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녀의 애정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반복되던 것이었다.


스탠리와 스텔라는

서로에 대한 탐닉이 극에 달한 인물들이었다.


끼리끼리 만난다고 했던가.

스탠리의 격한 모습을 사랑하고,

스텔라 또한 그 격한 모습을 즐기고 수용한다.


블랑쉬는 현실을 도피하는 캐릭터라면

스텔라는 현실을 수용하는

대비되는 캐릭터였다.



블랑쉬에게 미치라는 관심을 표하는 한 남자가 생겼을 때도

블랑쉬는 여전히 과거의 잔재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계속해서 음악이 들리고 고양이 소리가 들리는 등

과거는 그녀를 끊임없이 쫓아다녔고,

그녀는 그 과거를 두려워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과거를 잊기위해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계속해서 달리는 것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극중에서는 남자 캐릭터는 '현실적'인 캐릭터로 비춰진다.

스탠리뿐만 아니라 미치도.


과거라는 것은 항상 우리를 쫓아오지만,

100% 자신있게 담담히 마주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블랑쉬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과거를

미치도 블랑쉬의 과거를 수용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그녀는 정신병원에 과거와 함께 갇쳐버리게 된다.


우리의 과거가

그리고 우리의 감정이란 것이

결국에는 욕망의 표출에 불과한 것인지


그리고 그 욕망에 의해 우리가 가는 종착점은

고립과 과대망상인 것인지


사랑

욕망

도대체 무엇이냐.



기존의 104호 공연 무대에서

다양하게 무대를 활용하려고

무대 제작을 창의적으로 했다는 것에서

인상이 깊었다.


배우들은 전반적으로 잘 했지만,

다만, 남자 배우들의 에너지에 비해

여자 배우들이 가진 에너지가 워낙 크다보니까

남자 배우들이 밀리는 기분이 들었다.


스탠리 같은 경우에는 계속해서 비슷한 모습이

다소 단조로워 보였다.

애초에 무식하고 욕망뿐인 캐릭터에게서

복잡함을 기대하면 안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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