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의 

첫번째 강의 날,

 

강의를 가기 전에 군대에서 휴가나온 동생이랑 

약속이 있어서 공덕으로 향했다.

 

공덕역 족발골목은 

공덕역 5번 출구로 나와서 쭉  가서 왼쪽에 있다.

이곳은 자주는 오지 못하지만, 

방학이 되면 1번 이상은 찾아오는 곳이다.

족발도 먹을 수 있고 순대국도 계속 리필되니까.

 

하지만! 1번 이상은 찾아오지 않는다.

사실 술을 잘 안마시는터라,

이곳은 술 안마시는 손님에게는 

좀 노골적인 홀대가 있다.

엄청 눈치준다. 특히 할머니들이.

지난번에 겨울에 찾아갔을 때 

앉게 된 자리가 창가 쪽 자리였는데,

족발을 주문하고 앉았을 때부터

 할머니의 횡포가 시작되었던 적이 있다.

찬바람이 슝슝 들어오는 문을 

나는 닫고 할머니는 열고 반복하기를 수십차례.

그냥 기분이 상해서 빠르게 먹고 나왔다.

지난번에 가족끼리 먹으러 갔을 때에도 

술 안시켜서 엄청 눈치주던데,

친구랑 갔을 때에는 노골적이어서 

요즘에는 가면 그냥 마시던 안마시던 

남기고 오더라도 맥주 1병은 그냥 시킨다.

마음 편히 먹는 것에 대한 대가랄까.



두명이서 가서 족발(소)로 시켰다.

족발 (소)와 (대)의 뚜렷한 차이는 양도 있겠지만,

소 : 뒷다리 (지방층이 많다)

대 : 앞다리 (살코기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부드러운 뒷다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순대국이랑 순대도 무한 리필이라서.

최고로 좋아한다.



촬영도 끝. 자 이제 먹읍시다.

상병 우이삭씨.

전투식사 시작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두산아트센터로 이동!

종로 5가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오가약국'이 있는 코너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된다.



친절하게 이렇게 안내판까지.



두산아트센터 내려가는 길에 

아트센터 답게 많은 예술품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나의 시선을 끌었던 한 작품.

저녁으로 족발을 먹어서 였을까.

나는 작가분에게 죄송하지만 다른 제목을 주었다.

"내가 삼겹살을 바라볼 때"



그리고 이렇게 발로 연주하는 피아노도 있었다.


<사진제공 : 두산아트센터>


티켓박스에서 기자단으로서 이름을 확인 받고 입장.



오늘의 연사는 한병철교수님,

베를린예술대학에서 강의하고 계시다.

주제는 피로사회-투명사회-불신사회.

최근에 집필한 저서와 많은 연관이 있는 

강연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사진제공 : 두산아트센터>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대학생 부터 직장인 그리고 어른들도.

여기서 오랜만에 보는 친구도 만나서 반가웠다.

내가 앉아있던 자리는 무대 좌측 두번째 줄.

한병철교수님이 강연 나가기 전에 내 앞에 앉아계셨다.


<사진제공 : 두산아트센터>


한국말을 잘 못하셨는데, 

좀 많이 못하셔서 듣는 내가 답답했을 정도.

차라리 통역을 좀 많이 

사용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지만, 

그만큼 직접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져서 최대한 집중하고 들었다.

 

인문학이 무대에서 등장하면 저항력을 상실한다

학생이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참여와 저항 그리고 비평을 해야한다

 

인문학이 하나의 상품이 되는 것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오늘날의 저항력을 상실한 

인문학에 대해서도 비판을 거리낌없이 하셨다.

특히 오늘날의 인문학자에 대해 

'약장사'라는 표현까지 하면서.

 

"힐링"이라는 한국의 트랜드가 

인문학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심히 공감을 했다.

 

특히 오늘날의 "힐링"에 대해,

System이 바뀌어야 되는 것인데, 

Symptom만 해결하려는 근시안적인 모습이 

오늘날 장님을 만들고 있다고.

 

그분의 강의 중에 인상깊었던 부분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독일대학에서 

모든 일반인들이 강의를 참석하러 오는 

열린 강의라고.

강의를 수강하는 대학생보다 

일반인들이 더 관심많아한다는 것에서 

우리나라와 많은 차이점을 느꼈다.

 

오늘날의 인문학은 

'감정의 인문학' '욕망의 인문학'이라고도 하여 

사람들에게 달콤한 말을 제공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Digital사회는 

자유를 주면서 통제한다는 것에서 크게 공감했다.

특히 "좋아요" "사랑해요"로 통제된다는 것에서는 

쓴웃음을 질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사회가 왜 이렇게 가벼워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거세된 인문학"

 

나의 생각 : 감언이설을 즐기는 자는 필망할 것이다.

 

Communication이 자유의 공간이라 믿었는데,

통제의 공간으로 통제사회에 의해 넘어갔다는 말에

내가 생각하고 지향하던 

Communication이 없어진 것 같아 허탈했다.

 

SNS is no longer a free-zone.

Freedom is willingly restrained.

 

"PANOPTICON"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을 합성한 것이다. 

번역하면 '모두 다 본다'는 뜻이다.

 

원래는 죄수를 감시할 목적으로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르미 벤담(Jeremy Bentham)이 

1791년 처음으로 설계하였다.

이 감옥은 중앙의 원형공간에 높은 감시탑을 세우고, 

 

중앙 감시탑 바깥의 원 둘레를 따라 

죄수들의 방을 만들도록 설계되었다. 

또 중앙의 감시탑은 늘 어둡게 하고, 

죄수의 방은 밝게 해 중앙에서

감시하는 감시자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죄수들이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죄수들은 자신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결국은

죄수들이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팬옵티콘은 감시자 없이도 

죄수들 자신이 스스로를 감시하는 감옥을 말한다.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 

그리고 수감자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과사회"

스스로를 착취하고 우리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

피착취자, 가해자, 피해자는 동일하다.

이는 타자를 통한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감정의 자본주의"

우리는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사고 있다.

하지만 한계가 있는 소비다.

 

<불신사회>

 

오늘날의 사회는 투명하면서 불신이 더 많아졌다. 

투명성이 공동체를 보장하지 않으며 

공동체는 도덕성을 상실했다.

병든 사회 속에서 

투명에 대한 욕구가 더욱 증가되었고, 

불신은 더욱 악화 되었다.



강의 중에 1984년 슈퍼볼 하프타임 때 

쓰여진 Macintosh 광고를 보여주었다.

바야흐로 스마트한 권력, 

새로운 권력의 시대를 뜻했다.

빅브라더가 아닌 친절한 브라더로 변했다.

Authority가 사라진 것은 아니였다. 

다만 더욱 지능적으로 진화했을 뿐.

 

교수님께서 오늘날 Like는 아멘과 

고해성사와 묵주와 대등하다라는 말을 했다.

기분이 좋은 말은 아니었다. 

다만 사실이었기에 쓴 맛이 가득했다.

나조차도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이 쓰는 복음에 대한 글에 Like로 반응하지 않았나.

미쳐버릴 것만 같았지만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파괴하며 생산성을 증대한다 하였다.

정치인들에게 그리고 주변에 투명을 강요하지 말아라.

문제해결은 안되며 

오히려 위협만 줄뿐이다.

 

우리가 세금을 내고

그 서비스를 누리고자 하는 고객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깊게보라.

깊게 볼 때 문제 해결이 될 것이라는 것.

 

Multitude 보다 Solitude.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아직은 내가 많이 부족함을 느끼고 왔다.

하지만 이 또한 무대위의 인문학이었음을.

불은 내게 던져졌다.

이제 그 불을 꺼뜨리던지, 아니면 더 태우던지.

크리스천으로서 이번 강의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분의 모든 생각에 동의를 하는 바는 아니지만,


발언하는 천재보다 

침묵을 지키는 바보에 의해 세상이 바뀌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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