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일 : 2014.12.3,  22시

러닝타임 : 약 1시간 50분


 본 리뷰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비전문적인 리뷰입니다.


이번 연기연출기초 수업에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두개의 단막극으로 이루어졌다.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있는 극 두가지를 연달아서 본다는 것은

관객에게 상당히 피로감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학교에서 보았던 두개의 동아리 극과는 다른 모습이길 바랬다.


나는 신파극보다는 비극을 더 좋아하기에.


연기연출기초 수업에서 작품을 공연하는 것은

최종률 교수님이 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공연을 올리는 경우는 없었다.


보통 공연영상학을 새롭게 전공하는 학생들이 주를 이루기때문에

공연을 올리기보다 기본적인 것을 배우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배우고 체득하는 것만큼 큰 배움은 없으리라.


맨땅에 헤딩도 하고 모르니까 멘붕도 겪고

나중에 자신들이 공연을 한 녹화영상을 보고 이불킥을 하더라도 다 추억이니까.

나도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랐던 영상을 가끔 돌려보고는 하는데

정말 부끄럽고 누구에게도 감히 보여줄 수 없는 영상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추억팔이용으로 곱씹어보기엔 딱이라서.


이번에는 이 공연에 대해 두번의 리뷰를 쓰게될 것 같다.

더블 캐스팅이라서 호기심에 두번을 보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노래 : Aria da capo>는

Edna St. Vincent Millay의 작품으로 독특한 이력의 작가였다.

페미니스트 였고, 여자 이름보다는 남자 이름인 Vincent로 불리길 바랬고

양성애자였다보니 그때 당시의 시대상과는 역행하는 '사랑'을 한 사람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죽음은 상당히 기구해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한 뒤 8시간 이후에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반복되는 노래 : Aria da capo>는 처음에 쓰여졌을 때 ANTI-WAR을 위해 쓰여졌으나

오늘날에는 우리 삶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모습을 조명하기 위해 작품화되는 듯 했다.



이번 공연의 무대는 정말 단조로웠다.

흰 식탁보와 대비되는 검은 의자, 그리고 흰 사다리

무대의 높낮이를 주기 위한 검은 나무 무대


이전까지의 최종률교수님 수업의 무대를 생각하면

예술적인 디테일, 세부적인 묘사와 다양한 색감 그리고 세밀한 음영을 그렸던 것이 떠오른다면

이번 무대는 교수님의 손길이 제일 닿지 않은 듯 했다.



흑백의 공간에서 화려한 삐에로 같은 복장을 하고 등장한

컬럼바인과 삐에로의 대사는 난잡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허세, 어리석음, 허풍 등 희극의 모습을 띄고 있다.

 

이 모습들과 크게 대비되는 모습은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들이다.

 

코터너스 연출이 등장하여 즐겁고 웃긴 희극의 배우들과 장면을 밀어내고

비극을 시작하려고 한다며 코리돈과 타이시스를 희극의 무대 위에 잔인하게 밀어 넣는다.

 

코리돈과 타이시스에게도 잔인한 일이지만,

관객들에게도 관객모독이라고 할 정도로 코터너스의 말처럼

양해를 구한다면서 공개 리허설인 비극의 장면을 반강제로 보게 된다.

 

코리돈도 타이시스에게도 무대 장치 하나 없이 희극 무대에서

코터너스에게 반항 하나 없이 비극을 시작한다.

 

비극이 완전한 시작을 갖추기 전까지 크게 희극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

 

앞서 등장했던 컬럼바인과 삐에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타이시스과 코리돈이 대사를 틀리기도 하고 엉터리로 읽기도 하면서

관객들을 다시 희극으로 몰아넣는 듯 했다.

 

즐거운 게임을 한다며 담벼락을 쌓기 시작하는 코리돈과 타이시스

보이지 않는 벽을 완성시키고는 갈수록 불신이 깊어진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가 기르는 양에게 물을 주지 않고

코리돈은 보석을 찾기 바쁘고 타이시스는 보석에 욕심을 내고

물을 달라는 코리돈에게 물에 독초를 풀어 넘겨준다.

 

"양들에게 물을 주는데 네 것 내 것을 가려야해?"

 

우습게도 이 대사를 들으면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 교회 저 교회 성도 뺏어오기 부터 담벼락 쌓는 교회의 모습.

세상을 향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끼리 배척하고 배제시키는

교회의 모습이 떠올라서 씁쓸했다.

 

물을 주는 것처럼 속이지만, 그 물에는 독초를 풀어 주는 목동.

물을 재물을 주고 교환하려는 모습과 목마른 양보다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고는,

결국에는 재물로 목을 조여 다른 목동을 죽이려는 목동.

 

진정으로 양을 위하는 목동의 모습이 아닌 것이

오늘날 몇몇 교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더라.

 

코리돈과 타이시스가 희극의 무대에서 갈수록 비극이 고조되는데

연출인 코터너스는 의자에 앉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서 침묵하고, 잠을 자고 있다.

 

비극을 시작하라고 했고, 대사를 정해주었고,

그 비극의 주체들은 그 대사와 제한적인 무대 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연출한 연출자는 잠을 자고 있다.

 

연출자는 최상의 권위라고 느껴졌기에,

인간의 비극에 침묵하고 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극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만든 권력과 권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을 초래하고 연출한 기득권들을 향한 손가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작은 연못의 물을 가지고 싸움하는 목동들을 지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는 코터너스는 권리를 가졌지만 책임은 도외시하는 기득권들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오류를 보고도 도외시 하는 우리들일지도 모르겠다.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당연,

벽이 있다고 굳게 믿던 코리돈은 죽음 앞에서 “벽은 원래 없었다.”라며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오해하고 불신을 했는지 쌓아온 만리장성을 한순간 무너뜨린다.

 

코리돈과 타이시스의 죽음 이후 연출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

두 사람의 주검위에 흰 천을 덮어놓고 나간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희극.

 

코리돈과 타이시스의 주검위에 희극의 무대가 들어서고

다시 컬럼바인과 삐에로는 다시 그들의 반복되는 허풍과 거짓의 대사를 시작한다.

 

관객들은 아까처럼 희극을 볼 수 있을까?

 

글쎄다.

 

"희극이 시작되면 관객들은 비극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릴 겁니다."

 

연극을 통해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희극은 비극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모습이었다.


누군가의 비극은 누군가에게는 희극일 것.

하지만 우리가 결국 기억하는 것은 희극이라.

 

관객들뿐만 이겠나.

 

살아가면서 아픈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것을 곱씹어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픈 기억은 빠르게 떨쳐버리라는 것과

긍정적으로 살라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적인 조언이다.

 

하지만 잊어야 할 비극이 있고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 있다.

그런데 잊어야 할 비극보다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 더 많은 것 같다.

 

그 비극이 없다면 오늘날의 나도 우리도 당신도 있지 않을 테니까.

 

우리들의 죄로 인해 시작된 비극, 인류 최초의 비극.

그 죄로 인해 나도 당신도 그렇게 아픈 것이 아니겠나.

그리고 그 아픔을 홀로 짊어지고 가실 분이 와야만 했던 것도.

 

이번 한해도 벌써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비극이 많았던 한해였고, 비극의 연속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파했고,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도 그 비극에 동참을 했었다.

 

다음 생에는 영원한 행복 속에서 살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다면,

이 땅에서 찰나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할 몫이 있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 비극을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수요일 10시 공연은 김수민 배우가 코리돈 역을,

박정은 배우가 타이시스 역을 맡았다.


김수민 배우는 이전에 뮤지컬 무대에서 본적이 있었는데, 연극은 처음이었다.

이번 코리돈 역에서 타이시스와 담쌓기 게임을 하다가,

타이시스를 죽이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 전환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거짓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죽일 것처럼 그 감정이 느껴졌다. 그 뚜렷한 대비가 정말 좋았다.


극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소품없이 몸짓만으로 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전에 2008년에 마임을 했던 이두성 교수님이 생각났다.

그분이 학교에 계속 계셨다면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실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한 독고씨>의 작가인 Norman Holland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고독한 독고씨>의 원작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극에 대한 이해도는 앞선 작품보다 덜 알고 갔다.

어떠한 이름에서 <고독한 독고씨>로 번역이 되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주인공인 독고한은 죄수였다.

밥을 먹으라면 먹고, 잠을 자라면 잠을 자고,

모든 것이 통제되고 구속된 감옥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부분은 그의 생각.


자유롭게 아내를 만나러 가고,

옛 사업 파트너를 만나로 가고,

또 애인을 만나러 가고,


그의 생각 속에서 낭만 가득했고, 긍정적이고 행복할 것만 같았던

현실은 출소 후에 모든 것이 뒤바뀐다.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재혼하였고, 사업 파트너는 그를 문전박대하고,

애인이라고, 자신을 민우라고 불러주던 사창가의 연인은

술과 약에 찌들은 추한 꼴이 되어있고,

그의 생각 속에서 긍정적으로만 보이던 것은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

극의 끝에서 그는 다시 닫혀버린 감옥 문 앞에서 소리친다.


"날 들여보내줘"


<고독한 독고씨>를 보며 영화 <쇼생크 탈출>이 생각났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한 노인이 오랜 기간의 수감 후에 출소를 하지만,

세상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현실을 마주하지 못한 체 스스로 삶을 끊는다.


독고한도 극의 끝에 자신을 들여보내달라는 절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삶을 끊거나, 다시 감옥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원하지 않는 익숙함"


분명 원하지 않는 상황이다.

감옥 안에서 독고한은 철창문이 닫히는 그 소리가 너무나도 싫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익숙해진 것이다.


닫혀있는 것, 갇혀있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핵심감정"이라고 사람마다 느끼는

주요 감정의 고리를 계속해서 맴도는 것처럼

독고한도 그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독고한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지금 내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혼자 있는게 싫었는데 이제는 그 혼자가 너무나도 편해졌고 익숙해졌거든.


독고한의 막 전환 때 들려오던 지하철 터널 속 굉음과도 같은 소리.

끝을 알 수 없이 계속해서 어둠속을 달려가는 소리가

독고한의 끝없는 어둠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벗어나기 어려운 익숙함.


익숙함을 때어버린다는 것은 많은 아픔을 수반하는데 그 아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독고한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아픔이 더 커서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믿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배신.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가치가 상실할 떄,

이제는 자신이 폭탄을 피할 곳이라고는 감옥 외에는 없다는 것을.

자신을 진정으로 구원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을.


 

수요일 10시 공연은 박한나 배우가 성아역을 맡아서 하였다.

<고독한 독고씨> 중에서 유일한 더블 캐스팅인데,

'성아'의 온전했을 때의 연기와 술과 약에 찌들은 연기가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술과 약에 찌들은 연기가 더.


주인공은 독고한은 정말 역할에 딱 맞는 캐스팅이라고 느껴졌는데,

왠지 다음 작품은 목사님이나 약간 불쌍한 역할만 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장여사는 맛깔나게 연기했다.

화내는 부분도 재미있었고.


아내는 좀 아쉬웠다.

내가 너무 한국 막장 드라마의 연기를 바랬는지 몰라도

독고한의 심장을 그 누구보다도 가차없이 후벼팔 수 있는 사람은 아내였다,

그래서 기대치가 높았던 것 같다.

독고한이 처음으로 찾아갔던 아내에서 제일 크게 호되게 당하고 나서

그 이후 이어지는 장여사와 성아에게서 받는 상처가 더 커지는 것이 느껴졌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 외로 아내가 주는 상처가, 아내가 독고한에게 전달하는 원망과 분노가

첫 타자로서 약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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