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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의

두번째 연극, 엔론을 보러 다녀왔다.



5월 11일 일요일 3시 공연으로

<관객과의 대화>까지 할 수 있어서

신청하게 되었다.



미국 지폐에 온갖 낙서들이 가득한 이것이

연극 ENRON의 브로셔다.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뒷면.



마치 신문지의 1면처럼,

그리고 누군가가 신문을 읽으며

하이라이트 해놓은 것 처럼

중요 정보를 별도로 표시해놓은 것이

디자인을 매우 잘 했다고 생각했다.

특히 8컷 만화로 연극의 장면을 표현한 것도.



ENRON은 단순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연극이었다.

그때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이 이로인해

경제적 손실을 입었고,

미국에서도 이처럼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었고,

ENRON의 CEO와 관련된 사람들은 수감되어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2001년 말에 엔론이 보고한 재정상태가 

제도적, 조직적, 체계적, 창의적으로 계획된 

회계부정(분식회계)으로 지탱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엔론이 파산하자 엔론의 경영진은 물론 

회계법인, 법무법인 등을 상대로 한 

민,형사 소송이 봇물을 이루었다. 

엔론의 회계를 맡았던 아더 앤더슨은

 엔론이 파산하기 훨씬 전부터

 엔론의 회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묵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엔론은 2002년 1월 17일 아더 앤더슨과의

회계용역계약을 해지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엔론의 회장이었던

케네스 레이 회장과 최고경영자였던 제프리 스킬링은

연방법원에서 사기와 내부자 거래 등으로

각각 징역 24년 4개월, 24년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엔론의 외부 감사를 맡고 있던

미국의 5대 빅펌(회계법인) 중 하나였던

아서 앤더슨(Arthur Andersen) 역시

이 사건으로 인해 영업 정지를 당하고

 결국 파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엔론은

기업 사기와 부패의 유명한 상징이 되었다.

(위키피디아 발췌)



(사진출처 : 플레이DB)


배우들 하나하나가 모두 개성도 뚜렷하고

보는 내내 즐거웠던 작품이었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화려하고 무엇보다 넓은 무대가 돋보였다.

막 전환을 최소화하고 

뒷 배경에 스크린으로 여러 장소를 표현하며

화려한 연극이었다.


연극 처럼 보이지만,

뮤지컬 처럼 배우들이 단체로 춤을 추고

사태가 심각할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을 재미있고 재치있게

풀어냈다.


연극 시작할 때,

극장을 가득 채우던 WHY라는 목소리.

아마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

질문을 던져보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배우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려고 노력했고

서로에게 반응하려고 했다.

다만 조금 부족한 느낌.

뷰포인트로 하려는 것은 알겠으나,

잘 안된듯.

공연 전공하면 눈만 높아지는 것 같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언빌리 '버블'

명대사가 아닐까 싶다.

거품.

거품 밖에는.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엄청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음악과 춤으로 가볍게 풀이했다.

만약 이렇지 않았다면, 

엄청 침체된 분위기의 연극이었으리라 생각.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제프리 스킬링역을 맡은 배우는 정말 잘했다.

135분의 러닝타임 동안 흐트러짐 없이

거의 등퇴장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무대 위에 있었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랩터.

랩터의 상징을 생각해보며

극을 봐도 큰 재미로 와닿는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제프리 스킬링,

남자는 역시 수트.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다른 미국의 기업들을 저와 같이

퍼펫으로 표현했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정말 연기 잘했다.

처음과 끝.

계속해서 변하는 역할이었고,

그 변화가 느껴져서 좋았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연극은 전반적으로 흥미로웠다.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을

춤과 음악으로 재미있게 풀이했고,

다만 앙상블이 잘 만들어지지 않고

뷰포인트가 잘 안되서 그 점이 아쉬웠다.


그래도 작품 자체만으로도

단점들을 충분히 극복하고

주연들의 멋들어진 연기를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연극 초반에 극으로 들어가기 전

인트로 같은 대사를 끝으로

이 연극을 추천한다.


저는 변호사입니다.

세상이 어려울 때 돈을 버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죠.

회사가 망한다거나 실업률이 올라간다거나 

결혼이 파경을 맞는다거나

사람들이 자살로 내몰린다던가.


누군가가 나눠야하지 않겠습니까? 돈을?


이럴 때 우리는 실로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요. 

여러분들께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설명해드릴 수 있지만

저에게는 시간이 없고 

여러분에게는 돈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가끔 누군가가 튀어나와 

그런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오면 다들 위대한 사람을 찾아내 

그를 우러러 보면서 상황을 바꿔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사람 안에는 

잠재된 위험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께서 보게될 세상을 바꾸려고 시도 했던

어떤 사람은 20세기말을 뒤흔들고 

이번 세계에도 그림자를 던진 

기업 범죄의 배후에 있던 사람입니다.


모든게 사실이지만, 모든게 사실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마치 모두가 사실인냥 포장해서 보여드릴 것입니다.

뭐 사실 크게 다르지도 않습니다.


준비되셨습니까.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의 두번째 주제,

"우리는 지속할 수 있는가"

첫번째 강연인 

<아파트 게임과 중산층의 삶>이라는 주제로

박해천 교수의 강의가 

4월 28일 19시 30분 두산아트센터에서 있었다.



박해천교수는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이며

'디자인 연구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번 강의를 통해 디자이너가 바라보는

'부동산'에 대한 관점을 공유해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하고 새롭다는 생각을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디자이너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제까지 내가 바라보던 세상과는 달라서

흥미로웠다.

 

박해천교수는 유독 '아파트'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다양한 책도 냈다고 했다.



그중에 이번 강연 주제에 포함되어있는

'아파트 게임'에 대한 저서가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찾아보아도 좋을 것 같다.



매번 강의 때마다 1층에 앉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2층에 앉았다.

이때까지 내가 왜 1층에 앉았나 싶을 정도로

2층은 정말 편했다.

 

2층 맨 앞자리에 한정적이긴 하지만,

책상처럼 쓰기에는 딱이라

앞으로도 계속 2층으로 가기로.



중산층이라고 불리우는 계층.

중산층은 연소득 7000만원 이상일 경우라고 

교수는 말했다.

하지만,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말을 하나

소득은 중산층의 소득이 아닌 괴리감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조선일보 <인생 10계단>

박해천 교수는 갈수록 

마이너스 통장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소설가 박민규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단편소설을 인용하였다.

책 내용에서 아버지는 산수를 했고 

아들은 수학을 찾아 떠나는 모습이 나온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는 삶의 반복 

그 속에서 아득함을 느낀 생활인이라면 

누구나 '수학 정도가 필요한 인생'을 

꿈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산수 = 근로 소득

수학 = 자본 소득

 

산수는 근로 소득.

수학은 자본 소득을 상징한다고.



우리나라는 10년을 주기로

큰 변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세대별로 생긴

해프닝이 지금의 한국을 만들었다고.

 

4.19 세대

유신 세대

386 세대

.

.

.

 

그때는 10% 이상의 경제 성장과 함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지만,

지금은 경제성장률이 미미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

 

그때 당시에는 아파트를 분양을 받고

아파트가 2년 후에는 집값이 올라

더 큰 평수의 아파트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아파트가 주거 공간이 아닌

즉 수학.

아파트 게임이 한정된 재화를 통해 

빠른 성장이 일어난 것이다. 

 

옛날에는

중동 건설을 갔다오고

정관 수술을 받은 사람

청약 1순위.

 

우리 아빠 이야기잖아.



나는 비록 40대지만 부인만큼은 20대여야 한다.

1960년대 오비맥주 광고를 통해 

엿보는 그때 당시 시대상.



과거 살던 집은 이런 유형의 집이었다.

마당이 있고, 나무도 있고, 



하지만 시멘트, 플라스틱에 익숙하지 않던 세대가

아파트에 들어가면서 베란다에 정원을 꾸미고,

그때 당시 그린 인테리어가 부동의 1위 트랜드 였다고.



이것 말고도 

내가 어릴적 기억하는 차는 포니, 르망 등등.

정말 많았는데.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IMF 이전,

아파트 재건축 및 거래에 참여를 했던 것은 

정부, 건설회사, 개인

 

IMF이후에는 정부가 빠지고

은행이 참여하게 되었다고.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이날 속이 안좋아서 계속 화장실 들락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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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몇가지를 꼽자면,


1. 88만원 세대 그리고 그 이후. 중산층의 껍데기밖에 안될 것.


2. 갈수록 새집이 만들어지는게 둔화될 것. 


3. 한국의 경제 격변 이전에 항상 나라에 큰 일이 있었다.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등등. 어쩌민 이번 세월호 침몰이 전초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4. 한국의 교회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끼고 성장한다. 여의도 순복음 아파트, 과연 말 실수 였을까. 


5. 우리나라의 중요한 의사 결정은 2곳에서 이뤄진다. 강남의 대형교회와 강남의 룸살롱이다.


6. 내수 시장은 너희를 걱정하지 않는다.


왜 너희가 걱정하는지.
준비를 해라.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

 

별도로 참가 신청도 해야하고,

 

나 같은 경우에는 거리도 멀어서 더더욱.

 

하지만 기자단 활동은 열심히 ^^;;

 

두산아트센터에 꼭 가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강연 녹음된 것을 들어볼 수 있다.

 

PC용 링크 : http://www.podbbang.com/ch/7508

 

Mobile용 링크 : http://m.podbbang.com/ch/7508



이번에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에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의 마지막 강의로

서동진 교수의 

<사랑에 관한 질문들>이라는 강의가 진행되었다.

 

이날 전공 교수님의 부친상으로

참여할 수가 없었지만, 

뒤늦게 녹음된 것으로 들어보고 정리해볼 수 있었다.


<사진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8573>

 

강연 녹화를 들으면서 실제 강연 사진보다 

이 기사에서 나타난 사진이 이 사람을 표현하고 

느껴지는 그대로 나타냈다고 생각해서 

제일 처음으로 올리게 되었다.

딱딱한 강의자리가 아닌 

술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해야 될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교수이다.

 

그리고 강의에서 느껴지는 것은

진보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공격적인 진보는 아니었다는 생각.

 

그렇다고 해서 마냥 편한 강의 내용도 아니었다.

 

혁명 그리고 사랑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Les Miserables

생각이 많이 났다.



서동진 교수는 '사랑'이라는 주제는

이렇게 많은 청중들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닌

3~4명과 함께 은밀한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을 매우 신성하게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어쩔 수 없이 믿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 내밀하게 이미 믿고 있으면서도,

또 더 이상 믿을 가치가 없다고 

체념적으로 부인하는 것.

 

그가 정의하는 사랑은 위와 같았다.

불신의 대상임과 동시에 신뢰의 대상이며, 

역설적인 대상이 사랑이었다.

 

사랑은 이성적으로는 풀수가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성은 사랑과 함께 사는 날이 거의 없다지

- 셰익스피어 [한 여름밤의 꿈] -

 

한 여름밤의 꿈 대사라니..!

 

한글 번역한 대사보다는 

영어가 느낌을 더 잘 살리기에.

 

아마 저 대사는

And yet, to say the truth, 

reason and love keep 

little company together nowadays

이것이지 않을까 싶다.

 

보텀의 대사 중에

가장 '이성적'인 대사가 아닌가.

 

위 말을 교수가 인용했을 때,

얼마전에 내가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포스팅 했던 것이 생각났다.


<사진 출처 : facebook.com/lovedcause>

 

이처럼 이성을 잠시 외출하게 만드는 사랑을

오늘날에는 이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그리고 화학적으로 분석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사랑에 대해 해부를 하고,

사랑에 대한 결과물로 알약 몇알을 먹고

사랑에서 오는 고통조차 약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것들이 과학적으로 풀이가 가능하며,

과학 지식이 정복 못할 것이 없는 것일까?



위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다.

편할지는 모른다.

다만 불편과 노력을 배제한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아프게 고민하는 이 시간의 무게가

가벼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행복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었다면 

행복이라 불리지는 않을 것이다.

 

"카페인이 없는 커피를 마시는 것"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이상이었다.

커피맛을 보고 싶어하지만, 부작용이 있다.

그러한 부작용이 제거되어있기를 원한다.

 

심지어는 섹스조차, 적절한 쾌락만을 쫓는다.

 

군더더기 없는 사랑,

불편 없는 사랑,

 

이 실체가 없는 모호한 '사랑'을 설명하고 정의하고자 

교수는 영화 4편에서 나온 인물들을 통해 

'사랑'을 설명하고자 했다.



첫번째 영화는 <노예 12년> 감독 스티브 맥퀸이 

2011년 제작한 <Shame>이라는 영화다.

교수는 이 영화를 "거지같다"라고 표현했다.

 

영화 속 주인공 Brandon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소모한다.

섹스를 통해서.

오르가즘이 아닌 그저 

자기 자신을 분출하고 소모하는데에

 

공허

허무

분노

좌절

 

영화 끝에 그는 진실된 사랑을 찾아 떠난다.

하지만 그 끝에서도 그는 분출을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가 이 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의 섹스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교수가 "거지같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변할게 없다는 것을 알아서 였지 않을까.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대다수의 평은 1번 보고 

다시는 또 보기 힘든 영화라고 하였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 밑에 

밑바닥을 보여주어서가 아닐까.



오늘날 모든 심리적 문제의 해결을 

의사들은 신경 전달물질에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항우울제를 처방한다.

모든 종류의 심적 고통은 

프로작과 같은 알약으로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랑으로 인한 공허도.



언젠가는 마치 상비약처럼 될지도.

영화 <Equilibrium>의 사람들이

매순간마다 자발적으로 주사하는 것처럼.



교수는 사랑이 과학에 의해 정복된 시대에서

사랑이 희박해진 시대에서

어떻게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세상이 

"거지같다" 

"다 쓰레기다"

표현을 여과없이 말하였다.

 

'사랑'

'혁명'

 

그가 중요시 여기는 이 두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고 동시에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랑 = 혁명

둘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혁명은 현재의 세계와 다른 세계에 도달하게끔 한다.

우리가 거듭나는 경우를 느끼게 하는 것은 

사랑에 빠졌을 때이다.

 

개인의 변화는 사랑

세계의 변화는 혁명

 

사랑과 혁명

두가지는 관계맺음이 수반되기 때문에,

닮은 꼴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청중에게 세개의 질문을 던졌다.

 

1. 진실이란 있는가?

2. 필연성이란 있는가?

3. 보편성이란 있는가?

 

오늘날에는 매칭 서비스 '듀오' 처럼 

사랑이 서비스가 되어버린 시대인데,

이 세가지 질문에 답변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는 사랑이 비록 인기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오늘날이지만,

사랑을 탐구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사랑의 윤리학'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파이란>을 그는 소개했다.

 

여기서 그는 멜로 영화의 어려움을 잠시 이야기하였다.

로맨틱코미디가 아닌 

'사랑의 보편성'을 다뤄야하는 

멜로 영화의 어려움에 대해.

 

이 영화는 언어에 대해 논란을 가져온다고 하였다.

언어 & 사랑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를.

 

"너를 사랑해"

 

이 말은 모든 것을 바꾸고 얼려버리는 말이라고 하였다.

친구가 '사랑'이라는 단어로 인해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람

더 없이 불편하거나

더 없이 황홀하거나

미쳐버리게 된다.

 

이 언어의 힘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영화 <파이란>

 

사랑이 선언되었다.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나일 수가 없다.

나에게 선언된 그 사랑이라는 말을 떠맡기 위하여

나는 모든 공리적인 욕구를 포기할 수 있다.

사랑을 위해 내게 약속된 

쾌적하고 안락한 삶을 기꺼이 양보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이 나에게 죽음을 요구할 지라도 말이다.

 

배우 최민식이 연기했던 '강재'가 그런 사람이었다.

 

오늘도 호구

내일도 호구

영원한 국가대표 호구

 

그의 삶은 선언으로 인해 바뀌었다.

 

한 여인의 무책임할 수도 있는 

죽기 전의 마지막 말이 그를 바꿔놓았다.

 

강재씨, 당신에게 줄 수 없는 것, 

아무것도 없어서 죄송합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사랑하는 강재씨 안녕

 

이러한 일회성,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건은

'선언'으로 인해 발발했다.

예고된 것이 아닌 우발적이기에,

필연적이라고 하는 것.

 

'사랑'은 또한 시간에 구속되어있지 않다.

우리가 사랑한다 말할 때,

"3년간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영원히 사랑해"

사랑은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



3번째 영화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였다.

내가 이 책을 중학생 때 읽어서 내용은 가물가물했지만,

사춘기 시절 혼란만 주었던 책이었다.

 

프란체스카는 여기서 자신이 

굳게 사랑했다고 믿고 있다.

사랑에는 수 많은 이유는 열거할 수 있으나

그 원인을 정의할 수는 없다.

 

우리는 너무나 원인을 알고 싶어하지만,

원인은 찾을 수 없다.

 

"왜 나를 사랑해?"

 

이 질문에 그 어떤 답변도 이유가 될 뿐,

사랑의 근본적 원인을  밝히지 못한다.

그저 동업반복적인 "사랑하니까"라는 답변 밖에는.

 

원인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교수가 말했다.

 

교수의 예시에서 

요즘 <세월호 침몰 사건>이 생각이 많이 났다.

 

오늘날 많은 이유는 존재하나

원인은 없다.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음모론"

"Conspiracy Theory"

 

위와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발생한다고.

원인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원인을 찾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이유에 불과하고

이로 인해 투쟁의 부재를 가져온다.

투쟁이 부재가 곧 음모론으로 연결되며,

소문을 만들어내고

이를 두려워하거나 즐기거나 한다고.

 

오늘날 사랑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서

이유만 난무하고 

원인을 찾으려고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지막 영화로 그는 <Amour>를 꼽았다.

 

'윤리'와 '사랑'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이 영화를 

그는 '공감'이라는 요소와 함께 설명을 하려고 하였다.

 

'공감'은 차별성을 배제시키고

오로지 1인만 있다는 가정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살면서 자주 듣는 "고객님"이라는 호칭도

모든 손님이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개별성을 배제하고 대한다는 것.

 

영화에서 조르주는 아내에게 '공감'하면 할 수록

죽여달라는 아내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끝에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이 

기독교 신학에 관심을 많이 가진다고 그는 말했다.

특히 '바울'에 대해.

 

십계명 중에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웃을 '바뀔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특히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을 했는데,

예를 들어 필리핀 이주 여성이 있는데,

레이디 가가를 좋아하고, 빅맥을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오면 

생전 처음 입는 전통옷과

 필리핀 전통 음식을 요리하게 하는

괴물과도 같은 프레임을 강제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관용과 배려가 용납이 안되는 곳에서 

적용되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교수가 생각하는 

삶의 보편적 원리를 맺는 말로 말해주었다.


사랑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

필연적으로 기꺼이 승인하는 것.

전혀 다른 존재를 형성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창립하는 것.

 

교수는 사랑에 대해 보편성을 끄집어 내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 했다.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질문이 주어질 때, 

심각하게 동요하고 생각을 바꾼다.

특히 사랑에 대해 실패할 때 마다 

그런 것은 없고 내가 속았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에 대해 좌절할 때,

우리가 알던 사랑에 대해 거부한다.

 

오늘날 불신의 시대라는 것은,

진정으로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 지적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고, 혁명을 믿지 않는다.


Q&A 시간에 추가적으로 이야기했던 점에서는

교수는 무언가를 믿고 있는 것만큼 

추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특히 열성 기독교도를 '몰상식'하다고 말했다.


변화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위해 

믿음의 대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믿음이라는 핑계거리를 생산해낸다고.


그는 이 변화에서 믿음의 대상이

근본주의적인 종교로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통해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하였다.


강의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인 혹은 보수 성향을 가진 사람이 듣기에는

불편한 자리였다.


하지만 십계명 처럼 그도 "이웃"이며

자신이 정의한 것처럼 "바뀔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의 혁명은 없다고 말하는 그.


이제 남은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마저도 퇴색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그는 갈수록 말할 것이 없는 

Les Miserables 라고 느껴졌다.


 

그의 표현을 빌어 

추한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처럼, 남아있는 것이 사랑뿐이라면,

그 사랑은.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 1 John 4:8 - 



2014 <두산인문극장 : 불신시대>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이번에는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의 

<게보와 그림자> 라는 영화를 관람했다.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Manoel de Oliveira)

1908년 12월 11일

포르투갈 출생

 

현직 감독 중에는 최고령자이다.

무려 105세.

 

이분의 영화 스타일은 매우 정적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최소한이고,

Minimalism으로 최대한 프레임 안에서 

주변 환경과 소품을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상징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배우들에게는 스타일리쉬한 연기를 요구한다고 한다.

특히 연극적이지만,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요구한다고.

 

참 까다로운 영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O Velho do Restelo 

(lit. The Old Man from the Restelo) 라는

 단편영화를 제작중이란다. 

(2014.4.9 촬영 시작)



게보와 그림자

이 작품은 원작은 Raul Brandao

연극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는 6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고 한다.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 영화를 제작하는데 총 25일.

원테이크로 간 것은 아니지만, 

왠만한 장면들은 끊김없이 고정 카메라를

여러대 사용해서 제작했다고 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엄청 어두운 분위기다.

포르투갈 출신 감독의 프랑스 영화이다보니

영화 첫 장면부터가 다르다랄까.

특히 음악은 마치 라이브 오케스트라가

옆에서 연주하는듯한 분위기였다.

 

한 남자가 항구에 서 있다가 움직인다.

어두운 골목.

손이 나오고,

그 남자는 어둠속에서 있다가 나오면서 

도망가며 외친다.

"내가 하지 않았어"

 

마치 연극의 시작과도 같았다.



영화 내내 카메라의 움직임은 최소한이었다.

매우 평면적이었고, 정적이었다.

감독의 105세라는 나이때문일까 라는 생각도.

 

정말 연극적인 요소가 너무 많았다.

며느리는 독백이 많았고,

상황을 설명해주는 나레이터와도 같았다.

어찌보면 게보의 집에서 

며느리는 나레이터와 같은 존재인지도.



영화는 보는 내내 어둡다.

아무리 촛불이 키고 날이 밝아도.

마치 제목처럼.

모든게 다 그림자 속인 것만 같다.

게보의 그림자, 제목처럼.

 

게보는 끊임없이 아내를 속인다. 

아내의 환상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게보도 며느리도 노력한다.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싶어하고 

아들이 곧 희망인 아내지만,

이미 8년째 수배중인 아들이 

잘 지낸다는 거짓말을 한다.



아내는 매우 감정적이다.

그 감정에 휘둘려서 산다고 해야될까.

실체가 없는 것에 묶여서 사는 모습이다.

그래도 게보의 집에서 

가장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들의 첫 등장은 

이 영화에서 파격적인 장면이 아닐까.

가장 동적이고도 요란한 등장이었다.

엄마의 우울한 감정과 매우 상반되는 

UP된 감정의 극을 보여줌으로

엄청난 대비를 보여주었다.

아들의 등장 만으로도 집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게보는 영화가 흘러가는 내내 

반복적으로 계산을 한다.

그것도 아주 느리게.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게보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그가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도, 

아내를 위한다기 보다는

변화를 싫어하는 자신을 위해서.

 

그는 회사에서 정직한 게보로 불리우고 있다.

하지만 집에서는 정직과는 다른 모습으로 행동한다.

불쌍한 게보.

그게 그의 실체다.

 

특히 그의 대사 중에

Good fortune in life is when 

nothing happens

그의 삶의 좌우명 수준이다.

 

며느리의 "Good fortune is routine?" 질문에

Good fortune is always doing the same works 

and saying the same words

라고 답한다.

 

이때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가장 위험한 사람은 바로 게보 자신이었다.

며느리도, 아들도, 아내도 아닌 바로 게보 자신.

자신이 행복이라 생각하는 것이 변하고 무너질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게보는 영화 중반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그림자 아래 살고 있어.

평화는 오로지 잠 잘 때,

그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어

 

아들이 돌아와 말한다.

집은 숨막히다고.

가족들 모두가 다 일그러졌고,

다 다르다고.

 

아들은 돈을 훔쳐 달아나기전 

고뇌하면서 말한다.

자신에게 다른 모습이 있다고.

밤이 되면 자신이 주체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이 깨어난다고.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Everyone commits crimes,

at least in their thoughts.

 

과연 아들은 존재하는지 의심이 든다.

게보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밤의 어두움 보다 더 짙은 내 영혼의 어두움"

"내가 악이며 누구도 내일 범죄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림자는 있다.

 

  

영화에 대해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된 기사가 있다.

참고해보면 좋을 것.


http://cinema-scope.com/features/a-murderer-cannot-avoid-death-thoughts-on-manoel-de-oliveiras-gebo-and-the-shadow/


2014년 4월 1일 2시 프레스콜 공연

2014년 4월 6일 정기공연(관객과의 대화)

 

총 2번을 보러다녀왔다.

처음에는 프레스콜 공연을 보고 

끝내려고 했지만, 

프레스콜 공연 때 

수많은 셔터소리에 

도무지 극에 집중할 수가 없다보니,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장점 외에는. 

(정작 사진은 많이 안찍고 연극 보기 바빴다)


'관객과의 대화'가 있는 날 공연을 다시 왔다.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이번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에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

 

주제로 하는 연극이기에 가기 전에 

어떤 작품인지에 대해 찾아보았다.



Gina Gionfriddo (지나 지온프리도)

 

드라마는 

<Law & Order> <Cold Case> <House of Cards>와

<Rapture, Blister, Burn> <Becky Shaw> 등 

다양한 작품을 썼다. 

 

이번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의 

첫 연극 작품으로는 <Becky Shaw>가 준비되었다.


<Becky Shaw>는 이미 제작되었던 작품이었고, 

그때도 큰 센세이션은 아니지만, 

잔잔한 파동은 주었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공연 보러가기 전에 대충이라도 

대본을 읽어보고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인터넷에 찾을 수가 없었다.

두번째로 보러 갔을 때는 

기자단 리뷰 작성을 위해 녹음을 했다.

개인적으로 좋은 대사들도 많아서.

 

국내에는 번역본 조차 나와있지 않던 상황이라서.

뒤늦게 오늘 공연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이화여대 통번역연구소에서 번역을 했다고 한다.

 

영국에 있는 Almeida Theatre 에서

제작되었던 자료를 찾을  수 있었고,

공연을 보러가기 전에 읽어보고 갈 수 있었다.



다른 극장에서도 제작되었지만, 
내가 찾은 배부자료가 Almeida Theatre자료다 보니.
Almeida Theatre에서 제작된 홍보용 티저 영상이다.

연출인 Peter DuBois는 

Gina Gionfriddo 와는 Brown University 동창 사이.



Almeida Theatre <Becky Shaw> 포스터.
한국 포스터와 색채 사용은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다르다.
Almeida Theatre에서 제작된 것은 
약간 어릴적 보던 Archie 만화 느낌.
외국에서도 <Becky Shaw>를 
마치 한편의 시트콤이라고 표현을 한것을 봤는데,

포스터도 어두운 분위기 보다는 밝은 톤을 사용했다.


국내 <베키 쇼>의 연출은 박근형 연출 (극단 골목길 대표)였다.
2000년대부터 각종 연극 관련 상을 받은 경력이 있다.


배우


신덕호 (맥스 가렛 역)



이연규 (수잔 슬레이터 역)



강지은 (베키 쇼 역)



  김도영 (수잔나 슬레이터 역)  



박윤희 (앤드류 포터 역)

캐릭터 설명
Almeida Theatre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보니, 
한국판과는 다른 점이 있을 수도 있다
Almeida Theatre 자료는 
첨부파일에 있으니 확인할 수 있다.

수잔나 슬레이터
수잔 슬레이터의 딸, 35세, 
아버지의 죽음에 큰 영향을 받았고, 
감정적이고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맥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앤드류와 결혼했고,
앤드류 또한 사랑한다.
심리학 박사학위를 공부중이고 
어린이들을 심리치료하는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수잔 슬레이터
50대 후반의 나이다.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으며, 
자녀들과는 다르게 
감정과 죽음에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남편 리처드가 죽은 이후에 
어린 애인 레스터를 만나고 있다. 

맥스 가렛
나이는 36, 
수잔 슬레이터와 리처드 슬레이터에 의해 길러졌다.
어릴적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아버지는 화이트 칼라였지만,
계속 감옥에 들락날락하면서,
맥스를 버리려하지만,
리처드가 그를 불쌍히 여겨서 아들처럼 키워준다.
그는 많은 부자들의 자산을 관리하고 
리처드의 자산 또한 관리하고 있다.
여자관계는 복잡하다. 
보통 3개월 이상은 지속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의 연약한 모습은 싫어한다.

앤드류 포터
앤드류는 원래 작가지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결혼 직후 사무직으로 일을 한다.
사무직으로 일하는 것은 만족하지 않고 있다.
스키 여행에서 수잔나를 만나 결혼했다.
수잔나를 사랑한 것은 그녀의 연약한 모습이었다.
높은 연봉보다는 삶의 행복과 만족도를 위한 
이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맥스와 대조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연약한 여자에게 쉽게 끌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베키 쇼
나이 35세,
앤드류의 사무실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다.
재산도 없고 차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가족과는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
브라운 대학 중퇴, 안정적인 삶을 꿈꾸고 
정신과 치료도 받은 적이 있다.
이성과 교제를 가진 경험은 있지만, 
좋게 끝난적은 없다.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프리셋 장면.
프리셋은 다소 심심했다. 

회색의 낡은 느낌의 벽면과 고풍스러운 듯하지만, 

비싸보이지 않는 느낌의 호스텔 분위기랄까.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리처드 슬레이터가 죽고 
그 죽음에 슬퍼하는 수잔나 슬레이터,
그리고 자산 관리인으로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 맥스 가렛,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남편이 죽은지 6개월만에 
자녀 뻘의 레스터와 교제 중인 수잔 슬레이터,

남편이 남자였던 그의 비지니스 파트너와 
부적절한 관계에 있던 양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고,
슬레이터가의 자산이 거의 파산 직전이라는 것.
수잔은 레스터에 더 관심을 쏟고 
결국 자산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아버지의 죽음에 깊게 빠진 수잔나는 
맥스에게 위로를 받고자 한다.
맥스는 친여동생은 아니지만, 
동생처럼 25년간 살아온 수잔나와 하룻밤을 잔다.

이때 떠올랐던 것은 지난 민승기교수님의 강의에서 
"한번의 키스가 존재에 균열을 낸다"
라는 말이었다.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친동생 처럼 25년간 함께 살아온 동생과 
키스를 하고 성관계까지.
어찌보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작은 균열을 만들어 낸 것은 맥스와 수잔나가 아닐까.

매춘? 결혼? 다 같은거야.
서로 원하는게 있기 때문에 
두사람이 함께 하는거야
사랑은 그저 감각이야.
배고픔이나 추위처럼.
우리가 생존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주는 감각.
- 맥스의 대사 中 -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수잔나는 기분 전환하기 위해 갔던 
스키 캠프에서 앤드류를 만나 결혼했다.
맥스와 하룻밤을 잤던 날부터 8개월이 지난 시점.
수잔나와 앤드류는 
맥스와 베키 쇼를 서로에게 소개시켜 준다.

맥스와 베키는 단둘히 데이트를 나가지만,
데이트도 굴곡이 있었다.
강도 당하고, 맥스는 베키와 하룻밤을 지내고.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맥스는 연약함은 인정 못하는 성격이라서,
베키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
베키는 의존적이다.
문제는 의존적인 모습이 
앤드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
처음에 수잔나에게 호감을 느꼈던 이유가 
'다친 양'같아서 였는데,
더 이상 수잔나는 '다친 양'이 아니라서.

앤드류는 지속적으로 
'영웅'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데 그런 사람이다보니.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결국 앤드류의 이러한 모습이 
수잔나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결혼 생활에 위협을 느낀다.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거부하는 맥스.
계속 다가가는 베키.
맥스를 사랑하는 수잔나.
수잔나를 사랑하는 앤드류.
맥스로부터 통제받는 것에 익숙한 수잔나.
그러한 통제를 주지 못하는 앤드류.

모든게 다 엉망이 되어버렸다.

극의 끝 장면은 맥스가 앉아있고 
그 뒤로 베키가 다가간다.
마치 모든 것을 주도하고 통제하던 맥스의 주도권이 
베키에게로 전달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과연 행복할까.
과연 사랑했을까.

끝에 우정을 운운하는 맥스를 보며,
다들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랑'은 아니었던 것.


극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극 중간에 배우의 대사에 맞춰서 
극 무대가 움직이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관객의 몰입도를 방해할 수 있을텐데,
그 순간 내가 보는 것이 '연극'이라는 것. 
관객에게 갑자기 이 모든게 
다 실제가 아닌 거짓이라고 느끼게 했으니까.
무슨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인지 물어봤다.

연출님은 다른 작품에서 
회전 무대를 사용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Armeida Theatre에서 그렇게 했다)
두산인문극장 스페이스111이라는 
환경 내에서 시도는 했지만,
큰 성과는 없는 시도였다고 말해주셨다.




번역 극의 특성상 원작에 비해 
많은 부분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다른 곳에서 했던 <Becky Shaw>의 영상을 봐도.
그래도 나름 한국화하고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바꿔주었고,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두산 인문 극장에서 
4월 26일까지 하는 <베키 쇼>에 가볼 것.

끝으로 내게 인상 깊었던 대사 중 하나.

"남자가 착하다는 것은 종종 무능력과 짝을 이뤄"
- 수잔 슬레이터 대사 中 -

착하게 살 수 없는 세상
우리 사회는 이대로 지속될 수 있는가?



알메이다 극장 베키쇼 참고자료.pdf




강연을 가기 전에 

며칠 전 샀던 신발을 환불하러 

현대백화점 천호점에 갔다.

 

항상 살때는 이쁜데 막상 집에와서 보면 별로인.

백화점 이펙트일까.

 

요즘 날도 풀리고 꽃도 만개했고 더워지고 있다.

 

 항상 여름만 되면 빙수로 여름을 버티는데

 이번에는 좀 이른 빙수를 시작. 

 

현대백화점 천호점에도 밀탑이 생겼다고 해서.

 

가격이 오른듯? 

7000원대였던걸로 기억하는데

8000원이었다.

맛있긴 한데, 

요즘에는 빙수 밀탑처럼 만드는 곳이 많아져서.

앞으로 계속 갈지는 미지수.



이번 <두산인문극장 : 불신시대> 두번째 강의는 

민승기교수님의 

'오! 나의 친구여 친구란 없다' 라는 주제로 시작되었다.



민승기교수님은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이시며, 

해체론, 정신분석, 그리고 데리다와 라깡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렇다보니 강의의 제목 또한 

데리다의 저서 <우정의 정치학>에서 분석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 나의 친구여 친구란 없다'이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대주제의 첫 강연으로

 '우정'이라는 이름의 '사랑'에 대한 강연이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라는 개념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개념과는 다르다.



'두개의 몸'에 존재하는 한개의 영혼.

교수님께서 강의 때 말씀하신 '겹침'이라는 것일까.

'사랑'하면 필수적으로 생기는 '겹침'


르네 마그리트 '거대한 나날' 1928

 

르네 마그리트는 자웅동체를 그렸지만, 

남녀 사이에서 겹침의 지점, 즉 '혼돈'이 존재한다는 것.

 

교수님은 강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파울 첼란의 시를 읽어주셨다.

 

그것은 하나의 울림.

그것은 진리 자체가 인간들 가운데로 오는 것.

은유의 눈보라 가운데로.

 

그렇다면 '사랑=울림' 인가?

 

매 강의가 지속될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보다는 단순해지는 것 같다.

어려운 주제일지라도 답은 하나.

 

아카페, 필로스, 그리고 에로스.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한다.

부모와 자녀 그리고  친구사이의 사랑은 필로스.

본능 그리고 낭만의 사랑 에로스.

 

틈이 없고 차이가 없는 것은 에로스.

극복할 수 없는 거리를 가진 것은 필로스.

내제 되어 있지만, 틈을 가지고 있는 아가페.

 

사랑이 이토록 어렵던가.

교수님께서도 말하셨다. 

해체론은 간단한 것도 어렵게 한다고.



필로스는 사랑의 대상이 살아있음에도 

부제를 염두에 둔다고 했다.

온전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언젠가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 

죽음이 있을 수도 있기에.

하지만 그 거리로 인해 사랑이 유지되는 것이기도 하다.



에로스는 마치 E.T처럼.

연결되어있어야 한다.



아가페는 다르다. 

내 안에 있어야 존재한다. 

나를 벗어나고는 살 수가 없다.

나 또한 살 수 없다.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포옹이다.

포옹을 했을 때 겹치는 부분이 있다.

이곳은 남아도는 부분이기도 하면서 

제3의 공간이 되어버린다.

철학은 심리학 부터 신화까지 

많은 영역을 두루 알아야 되는 것 같다.

'포옹'에서도 신화를 차용해서 설명하는 것을 듣고.

 

들으면 들을수록 

인문학이 얼마나 성경적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제우스가 인간을 반으로 가르고.

우리가 죄로 인해 분리되고.

아담으로부터 분리되어 여자가 생기고.

또 다시 붙고.

아프로디테와 헤파이스토스의 이야기를 통해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

 

다시 제목으로 돌아와서,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

 

미래와 과거의 친구 모두를 포함해서 

그 존재를 無로 돌려버리는.

결코 화합할 수 없는 간극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는게 불편한 것이다.

'겹침' 이 불편한 것.

 

'겹침'은 차이가 아닌 

동질성을 갖춘 것이 부딫이는 것이므로

잉여물이 생긴다.

사랑의 메아리.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잉여물이 사랑인가?

 

도대체 사랑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친밀한 것들이 낯설 때, 

리는 사랑했나?



'난 널 사랑해'

결국 이 말도 누군가가 했던  말이다.

그 사람의 '사랑해' 와 나의 '사랑해'는 동일한가?

'나' 만의 사랑은 없다.

다만 이미 오염되어버린 변질된 말의 되풀이인가.

그렇다면 기계적인 반복이 

인간적인 사랑을 만들 수 있다고 봐도 무관한가.

 

언어가 사랑을 발생시키는가?


과연 순수한 사랑이 있을까?


교수님께서 롤랑 바르트가 했던 말을 인용해주셨다.


' 난 널 사랑해' 

이 말은 우리 매일매일 다시 시작하자를 확인하는 말이라고.


'사랑'이 매일매일 확인해야하는 

영원히 매꿔지지 않을 틈이었나.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하지 않은가?

적어도 신앙에서 나를 점검할 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삶이 연극을 모방하는가?

연극이 삶을 모방하는가?

 

이 질문에 혼란이 왔다. 

극 안에서의 삶을 꿈꾸지 않는가. 

영화, 연극 이러한 것들이 

현실에서 못보는 것들의 대리만족이 아닌가.

그렇다면 삶이 연극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가?

 


<우정>

 

"나는 너의 친구야"는 틈을 제공한다.

조르지오 아감벤의 강연문 '친구' 에서 그는

친구라는 말은 서술어가 아니며 

정의할 수 없는 단어라 하였다고 한다. 

내가 정의를 채워넣을 수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곳이 친구.


한창홍 '1994년의 사랑' 1994

 

장 뤽 낭시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다. 

비록 사랑에 대해 많이 이루어졌지만


사랑은 마치 내 속에 찔러 넣어진 칼 같다고 했다.

사랑은 조각난 상태로만 존재하고

칼은 나를 죽일수도, 

하지만 간직하면 칼은 꽂은 채로 살아있게.

불가능한 것을 품고 있는 것이 사랑.

 

"한번의 키스가 존재에 균열을 낸다"

 

틈.

균열.

 

사랑이 있긴 한걸까.

그냥 마치 끝없는 크레바스에 빠진 기분이다.



우리 시대의 친구는 

실시간 메시지 주고 받기 

그리고 네트워크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계산이 가능하다.

숫자로 바꿀 수 있다.

숫자로 할 수 있는게 과연 친구인가?


 

너무 어려운 주제의 강의였고, 

사실 내가 정리하면서도 잘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많았다.

내가 이해하는 선에서 최대한 적어보았고,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복잡한 내용이지만, 

답은 계속해서 하나라는 점이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가 사는 것.

모든게 다 아가페, 참 사랑으로 직결되더라.

 

오 나의 사랑 사랑은 없다.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의 

첫번째 강의 날,

 

강의를 가기 전에 군대에서 휴가나온 동생이랑 

약속이 있어서 공덕으로 향했다.

 

공덕역 족발골목은 

공덕역 5번 출구로 나와서 쭉  가서 왼쪽에 있다.

이곳은 자주는 오지 못하지만, 

방학이 되면 1번 이상은 찾아오는 곳이다.

족발도 먹을 수 있고 순대국도 계속 리필되니까.

 

하지만! 1번 이상은 찾아오지 않는다.

사실 술을 잘 안마시는터라,

이곳은 술 안마시는 손님에게는 

좀 노골적인 홀대가 있다.

엄청 눈치준다. 특히 할머니들이.

지난번에 겨울에 찾아갔을 때 

앉게 된 자리가 창가 쪽 자리였는데,

족발을 주문하고 앉았을 때부터

 할머니의 횡포가 시작되었던 적이 있다.

찬바람이 슝슝 들어오는 문을 

나는 닫고 할머니는 열고 반복하기를 수십차례.

그냥 기분이 상해서 빠르게 먹고 나왔다.

지난번에 가족끼리 먹으러 갔을 때에도 

술 안시켜서 엄청 눈치주던데,

친구랑 갔을 때에는 노골적이어서 

요즘에는 가면 그냥 마시던 안마시던 

남기고 오더라도 맥주 1병은 그냥 시킨다.

마음 편히 먹는 것에 대한 대가랄까.



두명이서 가서 족발(소)로 시켰다.

족발 (소)와 (대)의 뚜렷한 차이는 양도 있겠지만,

소 : 뒷다리 (지방층이 많다)

대 : 앞다리 (살코기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부드러운 뒷다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순대국이랑 순대도 무한 리필이라서.

최고로 좋아한다.



촬영도 끝. 자 이제 먹읍시다.

상병 우이삭씨.

전투식사 시작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두산아트센터로 이동!

종로 5가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오가약국'이 있는 코너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된다.



친절하게 이렇게 안내판까지.



두산아트센터 내려가는 길에 

아트센터 답게 많은 예술품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나의 시선을 끌었던 한 작품.

저녁으로 족발을 먹어서 였을까.

나는 작가분에게 죄송하지만 다른 제목을 주었다.

"내가 삼겹살을 바라볼 때"



그리고 이렇게 발로 연주하는 피아노도 있었다.


<사진제공 : 두산아트센터>


티켓박스에서 기자단으로서 이름을 확인 받고 입장.



오늘의 연사는 한병철교수님,

베를린예술대학에서 강의하고 계시다.

주제는 피로사회-투명사회-불신사회.

최근에 집필한 저서와 많은 연관이 있는 

강연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사진제공 : 두산아트센터>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대학생 부터 직장인 그리고 어른들도.

여기서 오랜만에 보는 친구도 만나서 반가웠다.

내가 앉아있던 자리는 무대 좌측 두번째 줄.

한병철교수님이 강연 나가기 전에 내 앞에 앉아계셨다.


<사진제공 : 두산아트센터>


한국말을 잘 못하셨는데, 

좀 많이 못하셔서 듣는 내가 답답했을 정도.

차라리 통역을 좀 많이 

사용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지만, 

그만큼 직접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져서 최대한 집중하고 들었다.

 

인문학이 무대에서 등장하면 저항력을 상실한다

학생이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참여와 저항 그리고 비평을 해야한다

 

인문학이 하나의 상품이 되는 것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오늘날의 저항력을 상실한 

인문학에 대해서도 비판을 거리낌없이 하셨다.

특히 오늘날의 인문학자에 대해 

'약장사'라는 표현까지 하면서.

 

"힐링"이라는 한국의 트랜드가 

인문학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심히 공감을 했다.

 

특히 오늘날의 "힐링"에 대해,

System이 바뀌어야 되는 것인데, 

Symptom만 해결하려는 근시안적인 모습이 

오늘날 장님을 만들고 있다고.

 

그분의 강의 중에 인상깊었던 부분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독일대학에서 

모든 일반인들이 강의를 참석하러 오는 

열린 강의라고.

강의를 수강하는 대학생보다 

일반인들이 더 관심많아한다는 것에서 

우리나라와 많은 차이점을 느꼈다.

 

오늘날의 인문학은 

'감정의 인문학' '욕망의 인문학'이라고도 하여 

사람들에게 달콤한 말을 제공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Digital사회는 

자유를 주면서 통제한다는 것에서 크게 공감했다.

특히 "좋아요" "사랑해요"로 통제된다는 것에서는 

쓴웃음을 질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사회가 왜 이렇게 가벼워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거세된 인문학"

 

나의 생각 : 감언이설을 즐기는 자는 필망할 것이다.

 

Communication이 자유의 공간이라 믿었는데,

통제의 공간으로 통제사회에 의해 넘어갔다는 말에

내가 생각하고 지향하던 

Communication이 없어진 것 같아 허탈했다.

 

SNS is no longer a free-zone.

Freedom is willingly restrained.

 

"PANOPTICON"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을 합성한 것이다. 

번역하면 '모두 다 본다'는 뜻이다.

 

원래는 죄수를 감시할 목적으로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르미 벤담(Jeremy Bentham)이 

1791년 처음으로 설계하였다.

이 감옥은 중앙의 원형공간에 높은 감시탑을 세우고, 

 

중앙 감시탑 바깥의 원 둘레를 따라 

죄수들의 방을 만들도록 설계되었다. 

또 중앙의 감시탑은 늘 어둡게 하고, 

죄수의 방은 밝게 해 중앙에서

감시하는 감시자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죄수들이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죄수들은 자신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결국은

죄수들이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팬옵티콘은 감시자 없이도 

죄수들 자신이 스스로를 감시하는 감옥을 말한다.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 

그리고 수감자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과사회"

스스로를 착취하고 우리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

피착취자, 가해자, 피해자는 동일하다.

이는 타자를 통한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감정의 자본주의"

우리는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사고 있다.

하지만 한계가 있는 소비다.

 

<불신사회>

 

오늘날의 사회는 투명하면서 불신이 더 많아졌다. 

투명성이 공동체를 보장하지 않으며 

공동체는 도덕성을 상실했다.

병든 사회 속에서 

투명에 대한 욕구가 더욱 증가되었고, 

불신은 더욱 악화 되었다.



강의 중에 1984년 슈퍼볼 하프타임 때 

쓰여진 Macintosh 광고를 보여주었다.

바야흐로 스마트한 권력, 

새로운 권력의 시대를 뜻했다.

빅브라더가 아닌 친절한 브라더로 변했다.

Authority가 사라진 것은 아니였다. 

다만 더욱 지능적으로 진화했을 뿐.

 

교수님께서 오늘날 Like는 아멘과 

고해성사와 묵주와 대등하다라는 말을 했다.

기분이 좋은 말은 아니었다. 

다만 사실이었기에 쓴 맛이 가득했다.

나조차도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이 쓰는 복음에 대한 글에 Like로 반응하지 않았나.

미쳐버릴 것만 같았지만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파괴하며 생산성을 증대한다 하였다.

정치인들에게 그리고 주변에 투명을 강요하지 말아라.

문제해결은 안되며 

오히려 위협만 줄뿐이다.

 

우리가 세금을 내고

그 서비스를 누리고자 하는 고객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깊게보라.

깊게 볼 때 문제 해결이 될 것이라는 것.

 

Multitude 보다 Solitude.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아직은 내가 많이 부족함을 느끼고 왔다.

하지만 이 또한 무대위의 인문학이었음을.

불은 내게 던져졌다.

이제 그 불을 꺼뜨리던지, 아니면 더 태우던지.

크리스천으로서 이번 강의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분의 모든 생각에 동의를 하는 바는 아니지만,


발언하는 천재보다 

침묵을 지키는 바보에 의해 세상이 바뀌는지도. 



두산인문극장 2014 수료과정과 

기자단을 모집하길래 지원해봤다.

선착순이다보니 빠르게 신청!

 

그리고 어제 결과 발표!

수료과정을 600, 기자단을 70으로 

추가로 선정했다고 한다.



짜자잔!

 

수료자로서 그리고 기자단으로서 해야 되는 미션 3가지!

 

1. 두산아트센터 홈페이지 회원 가입

2. [두산인문극장 2014] 강연 및 상영 9회 이상 참석

강연 9영화상영 3회 총 12회 중 9회 이상 참석 필수

3. [두산인문극장 2014] 연극 

<베키 쇼>, <엔론>, <배수의 고도세 편 관람


​강연도 참석하고 연극도 볼 수 있고! 완전 좋다. 

특히 기자단은 연극을 프레스콜 공연으로 볼 수 있어서 

사진 촬영도 할 수 있고 동영상 촬영도 가능하다는 것!

 

프레스콜 일정 : 

<베키 쇼>: 4 1(, PM 2:00)

 <엔론>: 5 7(, PM 2:00)

 <배수의 고도>: 6 10(, PM 2:00)

 

기자단이 해야하는 미션 또 한가지!

 

4. 강연영화연극 관람 후 일주일 내 

블로그페이스북싸이월드 등 

자신의 SNS 채널을 통해 후기 남기기



첫 강연인 한병철 교수님은 신청해놓았다.

저분의 책 <투명사회>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미드 <Person of Interest>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강연을 가기 전에 읽어봐야 겠다.


왜 '불신시대'인가?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속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함께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길!

 

[Λ] "눈맞춤"

2014. 5. 10. 22:47



오늘 결혼식을 가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며 승강장에 있는데,

스크린도어 너머에 있는 한 여자와 눈이 살짝 마주쳤다.

(아니였다고 하여도 그랬다고 굳게 믿을래)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마트폰 화면만 바라보는

지하철 역이라는 공간 안에서

찰나의 눈 마주침이 글쎄,

짜릿했다고나 할까.


문득

내 이상형이 저 반대편 승강장에 나타났을 때,


내 이상형이 내쪽 승강장에 있을 확률

혹은

내가 그 반대편 승강장에 있을 확률


아니면 눈이 마주칠 확률

손이 스칠 확률


그 어떤 것도 쉽게 계산이 되지 않는다.


사랑은 수학의 공식이 성립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을


번개에 맞은 것 처럼


LOVESTRUCK


강렬한 두 단어의 이 만남



LOVE + STR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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