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 Story



 관람일 : 2014.12.04,  22시

러닝타임 : 약 1시간 50분


 본 리뷰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비전문적인 리뷰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캐스팅으로 반복되는 노래 / 고독한 독고씨를 보았다.

전날과 다른 점은 <반복되는 노래>에서는 목동인 코리돈과 타이시스가 남자라는 점.

그리고 <고독한 독고씨>에서 성아 역을 맡은 배우가 다르다는 점.


오늘 리뷰는 전날 공연 본것과 유사하지만 새로운 생각들을 얻어갈 수 있었고

전 리뷰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해서 정리해볼 생각이다.


<반복되는 노래>


오늘 본 삐에로와 컬럼바인에서 유독 삐에로가 눈에 들어왔다.

전날 본 삐에로보다 확실히 배우가 조금 더 여유가 생겼고

무대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관객들이 반응을 해줄 때, 그때 삐에로는 더 살아났다.


다시 한번 연극은 배우 혼자만의 원맨쇼가 아니라

관객이 주는 것을 받아서 다시 돌려보낼 줄 아는 배우가

좋은 배우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번 <반복되는 노래>에서 가장 큰 차이점인 목동의 性변화는 기대감보다는 걱정을 앞섰다.


개인적으로는 여자 코리돈과 타이시스를 매우 즐겁게 봤었지만,

남자 둘이서 코리돈과 타이시스를 한다는 것이

연극 시작 전부터 마치 '퀴어'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될 것 같았다.


너무 선입견을 가지고 극을 보러 간 것일까.

두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데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밀당하듯 주거니 받거니 삐지고 하는 모습이 불편했다.

아마도 연출은 이러한 것을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남/여를 했다면 정말 재미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밀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비극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니까,

코리돈과 타이시스를 남자로 한 것은 적절한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브로셔에서 연출의 말 중

"인생엔 왜 비극이 있으며,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라는

비극의 시작점에 대한 답의 일부분을 삐에로의 대사에서 찾은 것 같았다.


코리돈과 타이시스의 죽음 이후에 삐에로는 다시 시작되는 희극 장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컬럼바인과 다시 대사를 나눈다.


"적당히 하지 뭐"


'적당히'라는 말이

오늘날의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고독한 독고씨>


공교롭게도 독고의 죄수번호는 '5270'이다.

앞서 <반복되는 노래>에서 삐에로가 언급했던 제품번호 '5270'과 같은 번호이다.


독고한도 <반복되는 노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앞에서부터 미리 티저 형식으로 나온 느낌이다.


<고독한 독고씨>의 첫 장면은 독고한이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보내달라며 절규하는 것으로 시작을 한다.

그리고 이 극의 끝은 독고한이 감옥 앞에서 자신을 들여보내달라며 절규를 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러한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

문제해결이라기 보다는 또 다른 <반복되는 노래>의 시작으로 보여졌다.


독고한은 극의 끝에서 성아에게 자신은 그저 이해받고 싶었다고.

그리고 성아는 그에 이렇게 답변을 한다.

"이해하지 못했나봐요"

각기 다른 자신들의 지나가버린 처지에 한탄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해받고 싶어 했고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독고한도 성아도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지 않았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편하게 느끼는 안식처 혹은 위험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있다.

그런데 이 피난처가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니게 될 때.

패닉룸처럼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던 곳이

오히려 자신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결국 독고한 처럼 묻게 된다.


구원자는 누구인가.

열쇠를 가진자는 누구인가.


답은 무엇인가.


이번 <고독한 독고씨>에서

'성아'역만 유일하게 더블 캐스팅이었다.

보통 주연을 더블 캐스팅을 하는 경우는 있어도

'성아'를 더블 캐스팅 하는 경우는

독고한을 연기한 배우에게 상당히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독고한을 연기한 배우에게 묻고 싶다.


'성아'역을 연기한 두 배우 중 어떤 사람과 더 호흡이 잘 맞았는지.




관람일 : 2014.12.3,  22시

러닝타임 : 약 1시간 50분


 본 리뷰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비전문적인 리뷰입니다.


이번 연기연출기초 수업에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두개의 단막극으로 이루어졌다.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있는 극 두가지를 연달아서 본다는 것은

관객에게 상당히 피로감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학교에서 보았던 두개의 동아리 극과는 다른 모습이길 바랬다.


나는 신파극보다는 비극을 더 좋아하기에.


연기연출기초 수업에서 작품을 공연하는 것은

최종률 교수님이 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공연을 올리는 경우는 없었다.


보통 공연영상학을 새롭게 전공하는 학생들이 주를 이루기때문에

공연을 올리기보다 기본적인 것을 배우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배우고 체득하는 것만큼 큰 배움은 없으리라.


맨땅에 헤딩도 하고 모르니까 멘붕도 겪고

나중에 자신들이 공연을 한 녹화영상을 보고 이불킥을 하더라도 다 추억이니까.

나도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랐던 영상을 가끔 돌려보고는 하는데

정말 부끄럽고 누구에게도 감히 보여줄 수 없는 영상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추억팔이용으로 곱씹어보기엔 딱이라서.


이번에는 이 공연에 대해 두번의 리뷰를 쓰게될 것 같다.

더블 캐스팅이라서 호기심에 두번을 보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노래 : Aria da capo>는

Edna St. Vincent Millay의 작품으로 독특한 이력의 작가였다.

페미니스트 였고, 여자 이름보다는 남자 이름인 Vincent로 불리길 바랬고

양성애자였다보니 그때 당시의 시대상과는 역행하는 '사랑'을 한 사람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죽음은 상당히 기구해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한 뒤 8시간 이후에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반복되는 노래 : Aria da capo>는 처음에 쓰여졌을 때 ANTI-WAR을 위해 쓰여졌으나

오늘날에는 우리 삶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모습을 조명하기 위해 작품화되는 듯 했다.



이번 공연의 무대는 정말 단조로웠다.

흰 식탁보와 대비되는 검은 의자, 그리고 흰 사다리

무대의 높낮이를 주기 위한 검은 나무 무대


이전까지의 최종률교수님 수업의 무대를 생각하면

예술적인 디테일, 세부적인 묘사와 다양한 색감 그리고 세밀한 음영을 그렸던 것이 떠오른다면

이번 무대는 교수님의 손길이 제일 닿지 않은 듯 했다.



흑백의 공간에서 화려한 삐에로 같은 복장을 하고 등장한

컬럼바인과 삐에로의 대사는 난잡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허세, 어리석음, 허풍 등 희극의 모습을 띄고 있다.

 

이 모습들과 크게 대비되는 모습은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들이다.

 

코터너스 연출이 등장하여 즐겁고 웃긴 희극의 배우들과 장면을 밀어내고

비극을 시작하려고 한다며 코리돈과 타이시스를 희극의 무대 위에 잔인하게 밀어 넣는다.

 

코리돈과 타이시스에게도 잔인한 일이지만,

관객들에게도 관객모독이라고 할 정도로 코터너스의 말처럼

양해를 구한다면서 공개 리허설인 비극의 장면을 반강제로 보게 된다.

 

코리돈도 타이시스에게도 무대 장치 하나 없이 희극 무대에서

코터너스에게 반항 하나 없이 비극을 시작한다.

 

비극이 완전한 시작을 갖추기 전까지 크게 희극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

 

앞서 등장했던 컬럼바인과 삐에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타이시스과 코리돈이 대사를 틀리기도 하고 엉터리로 읽기도 하면서

관객들을 다시 희극으로 몰아넣는 듯 했다.

 

즐거운 게임을 한다며 담벼락을 쌓기 시작하는 코리돈과 타이시스

보이지 않는 벽을 완성시키고는 갈수록 불신이 깊어진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가 기르는 양에게 물을 주지 않고

코리돈은 보석을 찾기 바쁘고 타이시스는 보석에 욕심을 내고

물을 달라는 코리돈에게 물에 독초를 풀어 넘겨준다.

 

"양들에게 물을 주는데 네 것 내 것을 가려야해?"

 

우습게도 이 대사를 들으면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 교회 저 교회 성도 뺏어오기 부터 담벼락 쌓는 교회의 모습.

세상을 향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끼리 배척하고 배제시키는

교회의 모습이 떠올라서 씁쓸했다.

 

물을 주는 것처럼 속이지만, 그 물에는 독초를 풀어 주는 목동.

물을 재물을 주고 교환하려는 모습과 목마른 양보다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고는,

결국에는 재물로 목을 조여 다른 목동을 죽이려는 목동.

 

진정으로 양을 위하는 목동의 모습이 아닌 것이

오늘날 몇몇 교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더라.

 

코리돈과 타이시스가 희극의 무대에서 갈수록 비극이 고조되는데

연출인 코터너스는 의자에 앉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서 침묵하고, 잠을 자고 있다.

 

비극을 시작하라고 했고, 대사를 정해주었고,

그 비극의 주체들은 그 대사와 제한적인 무대 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연출한 연출자는 잠을 자고 있다.

 

연출자는 최상의 권위라고 느껴졌기에,

인간의 비극에 침묵하고 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극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만든 권력과 권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을 초래하고 연출한 기득권들을 향한 손가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작은 연못의 물을 가지고 싸움하는 목동들을 지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는 코터너스는 권리를 가졌지만 책임은 도외시하는 기득권들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오류를 보고도 도외시 하는 우리들일지도 모르겠다.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당연,

벽이 있다고 굳게 믿던 코리돈은 죽음 앞에서 “벽은 원래 없었다.”라며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오해하고 불신을 했는지 쌓아온 만리장성을 한순간 무너뜨린다.

 

코리돈과 타이시스의 죽음 이후 연출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

두 사람의 주검위에 흰 천을 덮어놓고 나간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희극.

 

코리돈과 타이시스의 주검위에 희극의 무대가 들어서고

다시 컬럼바인과 삐에로는 다시 그들의 반복되는 허풍과 거짓의 대사를 시작한다.

 

관객들은 아까처럼 희극을 볼 수 있을까?

 

글쎄다.

 

"희극이 시작되면 관객들은 비극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릴 겁니다."

 

연극을 통해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희극은 비극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모습이었다.


누군가의 비극은 누군가에게는 희극일 것.

하지만 우리가 결국 기억하는 것은 희극이라.

 

관객들뿐만 이겠나.

 

살아가면서 아픈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것을 곱씹어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픈 기억은 빠르게 떨쳐버리라는 것과

긍정적으로 살라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적인 조언이다.

 

하지만 잊어야 할 비극이 있고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 있다.

그런데 잊어야 할 비극보다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 더 많은 것 같다.

 

그 비극이 없다면 오늘날의 나도 우리도 당신도 있지 않을 테니까.

 

우리들의 죄로 인해 시작된 비극, 인류 최초의 비극.

그 죄로 인해 나도 당신도 그렇게 아픈 것이 아니겠나.

그리고 그 아픔을 홀로 짊어지고 가실 분이 와야만 했던 것도.

 

이번 한해도 벌써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비극이 많았던 한해였고, 비극의 연속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파했고,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도 그 비극에 동참을 했었다.

 

다음 생에는 영원한 행복 속에서 살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다면,

이 땅에서 찰나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할 몫이 있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 비극을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수요일 10시 공연은 김수민 배우가 코리돈 역을,

박정은 배우가 타이시스 역을 맡았다.


김수민 배우는 이전에 뮤지컬 무대에서 본적이 있었는데, 연극은 처음이었다.

이번 코리돈 역에서 타이시스와 담쌓기 게임을 하다가,

타이시스를 죽이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 전환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거짓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죽일 것처럼 그 감정이 느껴졌다. 그 뚜렷한 대비가 정말 좋았다.


극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소품없이 몸짓만으로 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전에 2008년에 마임을 했던 이두성 교수님이 생각났다.

그분이 학교에 계속 계셨다면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실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한 독고씨>의 작가인 Norman Holland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고독한 독고씨>의 원작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극에 대한 이해도는 앞선 작품보다 덜 알고 갔다.

어떠한 이름에서 <고독한 독고씨>로 번역이 되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주인공인 독고한은 죄수였다.

밥을 먹으라면 먹고, 잠을 자라면 잠을 자고,

모든 것이 통제되고 구속된 감옥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부분은 그의 생각.


자유롭게 아내를 만나러 가고,

옛 사업 파트너를 만나로 가고,

또 애인을 만나러 가고,


그의 생각 속에서 낭만 가득했고, 긍정적이고 행복할 것만 같았던

현실은 출소 후에 모든 것이 뒤바뀐다.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재혼하였고, 사업 파트너는 그를 문전박대하고,

애인이라고, 자신을 민우라고 불러주던 사창가의 연인은

술과 약에 찌들은 추한 꼴이 되어있고,

그의 생각 속에서 긍정적으로만 보이던 것은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

극의 끝에서 그는 다시 닫혀버린 감옥 문 앞에서 소리친다.


"날 들여보내줘"


<고독한 독고씨>를 보며 영화 <쇼생크 탈출>이 생각났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한 노인이 오랜 기간의 수감 후에 출소를 하지만,

세상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현실을 마주하지 못한 체 스스로 삶을 끊는다.


독고한도 극의 끝에 자신을 들여보내달라는 절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삶을 끊거나, 다시 감옥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원하지 않는 익숙함"


분명 원하지 않는 상황이다.

감옥 안에서 독고한은 철창문이 닫히는 그 소리가 너무나도 싫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익숙해진 것이다.


닫혀있는 것, 갇혀있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핵심감정"이라고 사람마다 느끼는

주요 감정의 고리를 계속해서 맴도는 것처럼

독고한도 그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독고한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지금 내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혼자 있는게 싫었는데 이제는 그 혼자가 너무나도 편해졌고 익숙해졌거든.


독고한의 막 전환 때 들려오던 지하철 터널 속 굉음과도 같은 소리.

끝을 알 수 없이 계속해서 어둠속을 달려가는 소리가

독고한의 끝없는 어둠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벗어나기 어려운 익숙함.


익숙함을 때어버린다는 것은 많은 아픔을 수반하는데 그 아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독고한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아픔이 더 커서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믿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배신.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가치가 상실할 떄,

이제는 자신이 폭탄을 피할 곳이라고는 감옥 외에는 없다는 것을.

자신을 진정으로 구원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을.


 

수요일 10시 공연은 박한나 배우가 성아역을 맡아서 하였다.

<고독한 독고씨> 중에서 유일한 더블 캐스팅인데,

'성아'의 온전했을 때의 연기와 술과 약에 찌들은 연기가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술과 약에 찌들은 연기가 더.


주인공은 독고한은 정말 역할에 딱 맞는 캐스팅이라고 느껴졌는데,

왠지 다음 작품은 목사님이나 약간 불쌍한 역할만 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장여사는 맛깔나게 연기했다.

화내는 부분도 재미있었고.


아내는 좀 아쉬웠다.

내가 너무 한국 막장 드라마의 연기를 바랬는지 몰라도

독고한의 심장을 그 누구보다도 가차없이 후벼팔 수 있는 사람은 아내였다,

그래서 기대치가 높았던 것 같다.

독고한이 처음으로 찾아갔던 아내에서 제일 크게 호되게 당하고 나서

그 이후 이어지는 장여사와 성아에게서 받는 상처가 더 커지는 것이 느껴졌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 외로 아내가 주는 상처가, 아내가 독고한에게 전달하는 원망과 분노가

첫 타자로서 약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영국판 <Sherlock>의 성공은

미국판 셜록의 제작을 가져왔다.


셜록 홈즈가 Scotland Yards를 벗어나서 미국에서 다른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이곳에서도 Moriarty의 그림자는 여전하다.


영국판 <Sherlock>과 가장 큰 차이는 아마 Watson이 여자라는 점

그리고 한국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외모의 Lucy Liu가 맡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드라마를 보다보면 자연스레 비교하게 되는데

개인적인 취향은 조금 아주 많이 산만한 미국판 Sherlock이 더 마음에 든다랄까.

베니가 연기한 Sherlock은 지적이고 더 깔끔했는데

미국판 Sherlock은 지저분하고 여전히 마약 중독현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더 인간적이다.



영국 드라마 <Sherlock>과 색다른 맛을 제공해줘서인지

시즌3까지 제작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모습의 셜록 홈즈도 사람들은 즐기고 있나보다.


영국드라마와 색다른 에피소드 그리고 조금 다른 셜록을 보고 싶다면

<Elementary>를 추천한다.


<사진출처 - 꾼들 페이스북 페이지>


본 리뷰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비전문적인 리뷰입니다.


날씨도 쌀쌀해지고 하니 따뜻한 연극이 필요하다고 느꼈을까.

꾼들 회장의 말처럼 '꾼들 공연에는 경찰과 도둑이 꼭 나온다더라"라는 속설을 깨고자

다른 공연을 선보인다길래 다녀왔다.


"니...밥 마이 묵으래이..."

"아빠, 내 오면 축구화 사줘. 새거?"


이 대사 두줄만 놓고 봤을 떄의 첫 인상은

내 스타일의 공연이 아닐 것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또한 가족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진부할 수도 있고

다소 신파적일 것 같은 주요 대사들이 포스터에 삽입되었다보니

크게 기대가 안되는 부분들이 었다.

특히 가족이라는 소재로 12년간 촬영된 영화 보이후드를 보고 난 직후여서일까.

"또 가족에 관한 내용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라는 제목은 답답했다.

눈먼 사람에게 길을 묻는 것만큼 바보같은 질문이 있을까?


공연 보러 가기 전부터 이래 저래 복잡한 마음을 안고 들어갔다.



월요일 첫날 첫 공연을 보고 왔다.

화요일이나 수요일은 시간이 안되서 못보나 싶었는데

뒤늦게 월요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보게 되었다.



앞에서 보러온 사람들에게 포스터를 한장씩 나누어 주었는데

포스터를 다 펼쳐진 상태에서 나눠줬다보니

관람객 입장에서는 포스터를 왜 나눠줄까 하는 의문을 받을 법했다.

실제로 뒷자리에 앉은 관객들은 "이거 방문앞에 붙여놓으면 되는건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니 포스터를 접어서 주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접어서 펼쳐보면 그나마 브로셔로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공연을 다 보고 나오면서 보니까 포스터를 돌돌 말아서 놨더라.

조금은 아쉽다.



무대는 디테일에 충실했다.

나무에 메달린 낙엽들에 옛날 집, 평상 그리고 그네.


집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 옆에 누군가의 졸업사진이 있었는데

보면서 드는 생각이 연출이 이문원교수님의 팬인가 싶었다.

교수님도 지난번 <민중의 적 : 2014>에서 교수님만의 작은 시그니처로

초등학교 졸업앨범 사진을 넣었는데

이것도 그것을 보고 넣은 것인가 싶었다.


<사진 출처 - 제22회 한동대학교 젊은연극제 출품작 집으로 페이스북 페이지>


극 말미에 세트 벽 뒤로 무대 앞과는 다른 공간을 투영한 것도

<집으로>의 느낌과 비슷했다.


<눈 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는 희극의 모습을 한 비극이라고 생각되었다.


소아암을 앓고 있는 선호,

그리고 어릴때 소아마비를 앓았는지 팔과 다리가 불편한 엄마 김붙들,

그리고 어릴 때 사고로 머리를 다쳐 글도 모르는 어눌한 아빠 이출식,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있고 불행한 이 가족을 보면서

답답함이 제일 컸다.


첫째는 목욕하다가 물에 빠져 죽고,

둘째는 암에 걸려 수술을 하더라도 생존의 가능성도 희박하고

그렇다고 해서 수술할 비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삶의 낙이라고는 없는 이 가정에도 낙은 있었다.


너무 바보 같아서 그렇지.

바보 아빠는 손톱깎아주고 발톱깎아주고 업어주고.

욕쟁이 엄마는 온갖 욕은 얻어먹으면서도 선호만큼은 지켜주려고 하는 마음.

각자가 할 수 있는 방법과 영역 내에서 최대한으로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큰엄마도 큰아빠도 이모도 악하다 손가락질 할 수 없는 것이

각자 처자식이 있으니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한 최대한으로 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은 이장과 목사겠다.


이장은 모든 것에 대한 공치사를 스스로에게 돌리고

또 그것도 모자라 공금을 스스로에게 돌리고자 노력하고 있고

목사는 말씀을 보자 기도하자 하지만 기도의 방향성이

사람이 아니라 그 외의 것을 향해 있다는 점을 문제점으로 볼 수 있겠다.


오죽 하면 목사의 대사 중에 이런 대사가 있지 않았겠나.


"쉿! 방금 어디서 개소리가 들리지 않았나요?"



극 끝에서 가족이 교회를 찾아가 기도하는데

의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아빠가 기도할 때마다 돈을 넣는데

아버지의 액자가 탁하고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아들의 모습을 아버지가 죽어서도 보기 싫은가 싶었다.


극 끝에 아버지가 약을 먹고 죽는 장면을 보면서

"자...어떻게 이제 극을 마무리 할까?"라고 생각이 드는순간

하우스 불이 켜졌다.


뭐지.

당황하기도 했고 뭔가 찝찝한 마무리.


내가 극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나?


나에게는 사투리도 잘 알아듣기 어렵거니와

욕이 계속 오고가는게 그렇게 웃긴 상황도 아니라서.

내 웃음 포인트와는 좀 달랐고,

옆에 앉은 여자 관객들이 훌쩍 거리며 보는 것과 다르게

내가 워낙 눈물이 없다보니

감동보다 답답함과 짜증이 더 많이 났던 것 같다.


그래도 극 중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꼽자면

'아픔'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이 수술받으러 가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농약을 먹었다는 아빠.

손톱을 깎아주다 너무 바짝 깎아서 아픔을 느낀 아들.

그리고 큰엄마에게 맞던 엄마.


아픔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래도 그 아픔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그나마 괴물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겠나.


사랑은 필연적으로 아픔을 동반한다.

아마 그 연결고리를 보여주고자 함이 아닐까.


많이 아프고 많이 사랑하자.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극 중 선호가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하는 대사

"아빠, 내 오면 축구화 사줘. 새거?"

어쩌면 앞에서 계속해서 감동을 주다가

펑! 터뜨려줘야 되는 대사가 아닐까 싶었는데

그냥 흘러가버린 것만 같았다.


음향 실수가 몇번 있었긴 한데

전화를 받았는데 뒤에서 계속 희미하게 전화벨이 울려

소오름


관객 수가 적어서인지

이장 방송 때와 막과 막 사이 음악 음향이 너무 커서 귀가 아플 정도

[Λ] "인터스텔라"

2014. 11. 13. 03:26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다 쓰고 나서 보니 스포일러 투성이네요


영화관을 평소 잘 찾지 않고 정말 어지간한 영화가 아니라면.

그런데 너무 화제가 되기도 했고,

서울 올라간 김에 보러가야겠다 싶었다.


아이맥스용으로 촬영된 영화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아이맥스 관람을 추천하는데

생각해보면 아이맥스 추천하는 사람들은

아이맥스 버전만 본 사람이 대부분일텐데

2D랑 4DX까지 보지도 않고 아이맥스를 추천하는 것은 이상했다.

그리고 서울에 아이맥스로 볼 수 있는 곳이

워낙 제한적이었고 표도 구하기 힘들었다.



정말 운이 좋게는 아니고

틈날 때마다 CGV 어플을 통해 좌석 확인을 했고

왕십리 아이맥스에 좌석이 취소되어

정말 좋은 시간에 보고 포항내려가기 좋은 시간으로

티켓을 잡을 수 있었다.



아이맥스 보기에 좋다는 G열에 가운데

아이맥스 첫 경험으로 손색없는 자리였다.



아이맥스관은 처음이었다.



정말 스크린은 컸고 렌즈를 끼고 갔던 터라 조금 눈이 부시긴 했다.



인터스텔라에 대한 솔직한 감상평은 "그럭저럭"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언론에서 대단하다 떠들어도

너무 과한 찬사라고 생각이 들었다.


우주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

특히 종말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아마게돈, 아폴로13 등등 우주 관련된 영화는 빼놓지 않고 보았고

우주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고

어릴적에는 UFO에 빠져서 살았으니

(Alien Abduction이 실제로 있다고 믿는 이유가 있다)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장면에서는 매우 만족을 했다.

다만, 그 어떤 우주 장면은 다른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터라

이전에 상영했던 그래비티에서도 우주를 유영하는 장면 같은 경우

감탄을 하고 부러움까지 느꼈었다.


다만 인상 깊게 봤던 장면 중에 쿠퍼가

우주에서 빗소리와 벌레 우는 소리를 듣는 것을 보고

적막 가득한 우주에서는 저 소리들이 그리워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전에 군대에서 야간 강하를 했을 때 캄캄한 밤 하늘에

둥둥 떠 있었을 때 잠깐 느낄 수 있었던 적막이 나는 매우 그리운데

우주에서는 오히려 지구의 소리들이 그립다니.


항상 사람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나보다.


지구가 계속해서 병들어가는데 각종 병충해와 모래먼지로

작물재배가 힘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지구의 미래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다만, 놀란 감독이 생각 외로 허술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모든 작물들이 병충해로 사라지고 옥수수만 재배할 수 있는데

도대체 주인공은 어떻게 맥주를 마시는 것인가 싶었다.

위스키라면 모를까.


그리고 식량이 부족하다는데

인도에서 날아온 드론 잡겠다고 옥수수를 다 때려부시는 장면에서

뭐여...........배고픈거 맞아?



우주로 가서 첫 행성에 도착 하여

거대한 파도가 몰아쳐서 23년을 낭비했을 때,

로밀리가 수면 상태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있었는데

너무 멀쩡했다. 정말 너~무 멀쩡했다.


아폴로 13호도 그렇고 우주에서 홀로 있다보면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것 같던데

티타늄 멘탈인지 아주 멀쩡한게 이상할 정도.


그리고 이전 탐사에서 가족들이 없는 사람들을 탐사로 보냈는데

두번째 탐사에는 왜 가족이 있는 사람들을 탐사로 보냈는지에 대해

타당한 설명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로봇 수준들; 케이스나 타스를 보자면

굳이 사람을 보내야 하나 할 정도로

너무나 월등한 로봇들이었다.


앞서 보냈던 과학자들 중에

'닥터 만'만 살아있고 나머지는 죽었는데

아무리 수면 모드라지만 '닥터 만'은 우쨰 살아있는고.


정말 저러한 '수면 모드'가 가능하다면

일단 나부터 '수면 모드'에 넣어서 50년 주기로 깨워줬으면 좋겠다.

미래가 어떻게 바뀌는지 궁금하거든.



쿠퍼 박사가 미래에서 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메시지를 전해주는 방법에서


"정답은 사랑이야"라고 말하고서

'모스 부호'를 사용하는 것에서 허탈한 웃음만.


5차원에서 메시지를 전달하고

우주를 유영하다가 발견이 된 쿠퍼 박사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2년간 수면모드에 들어가있던

딸을 만나는데 머피는 곧 임종을 맞이한다.

그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다른 행성에서 있을

브랜드 박사를 찾으러 가라고 하는데

도대체 왜 찾으러 가야하는지 모르겠다.


쿠퍼와 아멜리아 브랜드와 다른 사람들이

지구를 대체할 다른 행성을 찾으러 간 사이

1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인류는 이미 생존의 방법을 찾았다.

 

그런데 쿠퍼가 아멜리아 브랜드를 찾으러 간다는 것은

거의 또 다른 100년의 흐름을 가져올텐데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아멜리아는 새로운 행성에서

수정된 난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사회를 꾸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누가 올지도 안올수도 있는 불확실성을 가지고

그리고 이미 지구가 멸망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주어야 하는 수정란을 놔두고

'수면 모드'에 들어가는 아멜리아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싶다.



분명 재미도 있었고 무엇보다 우주라는 영상미가 돋보였던 영화였다.

진부한 감동을 전해주려고 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효과는 톡톡히 봤다.


하.지.만


굳이 아이맥스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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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자로 Doctor Who 시즌 8이 막을 내렸다.


새로운 얼굴의 뉴 닥터 '카팔닥'을 적응하는데

생각외로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무엇보다 재생성 했을 때 신선하고 젊은 느낌을 항상 보다가

늙은 닥터를 보다보니 더 이질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젊은 닥터와 클라라의 톡톡튀는 맛을 보다가

갈수록 에피소드마다 닥터의 어두운 모습들이 부각되다보니 더더욱.


시즌8 이후에 닥터가 어떻게 될지는 기대해봐야겠다.



짐작하기로는 시즌8에서 MASTER가 MISSY로 재생성되어

등장한 것으로 봐서는 나중 시즌들에서

닥터가 여자가 될수도 있지도 않을까 싶었다.



닥터후 시즌 8 피날레 에피소드에서

닥터후의 클라아와 마지막 이별 대사가 인상 깊었다.


"Never trust a hug, it's just a way to hide your face"



이제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만 손꼽아 기다리겠네.



다크해 다크해 다크해

에어리언인줄.



12년간이나 찍었다는 영화

<Boyhood>를 보았다.


짧은 단편들을 모아모아 편집해서 만든 것이라서

뚝뚝 끊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매끄럽게 연결도 되고 이야기에 빠져버렸다.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러한 영화가 한국에서 제작될 수 있을까 싶었다.

우리 나라 애들은 학교 갔다오면 학원가기 바쁠테니까.


주옥같은 대사들도 많았고,

무엇보다 영화 첫 장면부터 낯익은 Yellow 가 흘러나오고

주인공이 어린시절 부르는 노래들도

다 내가 들으며 자라온 노래들이었기에

정겹게 느껴졌다.



이 영화의 주옥같은 대사들이 많았지만,

나를 붙잡았던 순간은 바로 이 대사다.


You know how everyone’s always saying seize the moment?

I don’t know, I’m kind of thinking it’s the other way around,

you know, like the moment seizes us.


Yeah, I know, it’s constant, the moments,

it’s just — it’s like it’s always right now, you know?



인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

나중에 늙어서 보면 또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때는 아빠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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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초등학교 때 퇴마록 몰래 읽으면서 엄청 재미있었는데

DC COMiCS의 Constantine이 드라마화 되어

이번에 시작을 하였다.



이전에 동명의 영화로 키아누 리브스와는 다른

느낌의 배우가 존 콘스탄틴 역을 맡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더 마음에 든다.



한때 이 드라마 존 콘스탄틴으로 키아누 리브스가

다시 거론되기도 했지만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존 콘스탄틴 역을 맡은 배우는 좀 장난기도 있으면서

별로 진지하지 않은 느낌이다.


키아누 리브스는 정말 너무 하드코어 느낌.



퇴마도 화려하다는 느낌보다는 매우 원시적인 느낌

퇴마록으로 치면, 박신부가 초반에

라틴어로 기도하는 것과 성수만 가지고 했던 것과 비슷



동료였던 Jasper의 딸인데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영혼을 볼 수 있다.

퇴마록으로 치면 승희와 같겠다.



나름 천사도 등장한다.



1화의 하이라이트 장면

간지..

[Λ] "TMNT"

2014. 11. 1. 14:33



이번에 개봉한 닌자거북이 영화를 보았는데..

완전 우락부락한 닌자 거북이

청거북이 바뀐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비주얼



분명 내가 어릴 적 본 닌자 거북이는

둘리와 다를바 없는 인상이었는데

이번 닌자거북이는 하드코어였다.



그래도 나름 귀여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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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도 아닌 것이

초능력자도 아닌 것이

슈퍼 히어로도 아니고

그냥 아주 우연한 계기로

200년 동안 죽지도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닥터 헨리 모건.


어떤 사고를 당해도 그냥 매번 똑같은 장소에서 부활



발가벗고

물에서

매번 35세의 나이로 부활

그렇다보니 왠만한 역사라던지 겪을 만큼 겪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연구하고

죽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기 위해 검시관으로 일을 하면서

NYPD형사를 도와 사건을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간다.



이따금씩 잊을만 하면 그에게 걸려오는 전화

200년 동안 계속 부활한 그보다

2000년 더 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지만,

정체를 알 수 없어서 아직까지는 소강상태



아직 시즌1이 한창이지만,

이미 시즌2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상황.


재미지다.

그러니 봐도 좋을 것!



지난 7월에 방영되어 10부작으로 끝이난 <The Lottery>를

최근에서야 접하게 되었다.


설정이 매우 흥미로워서 내 관심을 끌었다.



때는 2025년

5년전 마지막 출산을 끝으로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불임이 되어버린다.



여자들은 강제 혹은 난자를 정기적으로 체취를 하며,

남자들 역시 정자를 정기적으로 기증을 한다.


몇년째 인류 종말을 막기위해 과학자들이 실험에 실험을 반복하지만

계속되는 실패

그런데 아주 우연한 계기로 무슨 이유에서인지

딱 100개의 난자가 수정이 된다.



실험에 성공한 과학자는 더 이상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고

미국 정부에게 난자를 빼앗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과학자는 난자를 기증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정치적인 용도로 이용하려고 한다.

미국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정치적으로 지지를 받기 위해

지원자에 한해서 '대리모'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한다.


기증자가 적혀있는 데이터파일은 정부로부터 압수를 당하고

과학자에게 남아있는 것은 미리 확보한 난자 기증자 1명과

정자 기증자 1명의 이름


우여곡절끝에 난자 기증자를 찾지만

미국 정부의 발 빠른 대처로

난자 기증자는 자살로 위장되어 죽임을 당하고



5년전 태어났던 6살난 아들을 가진

정자 기증자는 미국 정부로부터 도망을 간다.



미국 정부는 난자를 대외적으로는

추첨이라고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여군들을 대리모로 사용하려고 한다.

전세계적으로 불임인 상황에서 미국이 100개를 인공수정에 성공하게 되면서

중국이 미국 외교관을 인질로 하여 인공 수정을 한 난자를 요구를 한다.


일단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지만,

아직은 결말은 보지를 못했다.


시즌 1의 마지막화도 보지도 못했지만,

아마 시즌 1으로 제작중단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미국인들사이에서도 시즌2가 제작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입장..


소재는 정말 참신하지만, 시청률에 따라 제작여부가 확정되니 아쉬울따름..


[Λ] "생활의 발견"

2014. 10. 25. 12:5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15>


사도바울이 자신을 빗대어 표현했던 괴수,그 괴수의 모습을 이 영화에서는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많은 영화들이 있었지만, 모든 영화를 볼 수가 없었고,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작품을 보면서

그래도 동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 영화 감상문 이상의 생각을 안겨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보게 되었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은 2002년에 제작되었지만, 너무나도 날카롭게, 적나라하게 인간에 대해 그리고 있어서 보는내내 불편했다.


특히 제목 <생활의 발견>이라고 무덤덤하게 마치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오랜 기간 동안 사람안에 가지고 있는 본성을 ‘발견’이라는 용어로 꼬집어내는 것이 매우 불쾌했다.

불쾌함을 가지고 봤지만,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것과 같이, 인간이라면 내재되어있는 본성이기에,

나 또한 영화 내내 마치 망가진 라디오처럼 반복되던 “우리가 인간이 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이 되지는 말자” 라고 말하던 주인공처럼,

나 또한 괴물이 되고 싶지 않고, 괴물로 남고 싶지 않아서 이 영화를 보면서 분석을 하기로 하였다.

어디까지나 전문가적인 견해보다 내가 이 영화를 통해 풀이한 점 그리고 영화를 나의 거울 삼아,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나의 ‘괴수화’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멈추고 싶었다


영화의 시작에서 주인공인 경수에게 한 선배가 이렇게 말을 한다.


“우리가 인간이 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이 되지는 말자”


이 대사는 영화 내내 계속해서 주인공에 의해 반복이 된다. 마치 망가져버린 테이프처럼 계속해서 한 구간을 재생하는데,

그 구간이 하필 저와 같은 대사와 같았다.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그 어느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않기 위해 말하는 듯 했다.

경수가 춘천으로 내려가 오랜 선배를 만나고서 선배에게 다시 이 말을 읇조린다.

그곳에서 선배와 함께 찾은 소양호에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기도 한 “On the Occasion of Remembering the Turning Gate”에서

언급되는 회전문과 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고 필요로 하게 될 때에 머물고 마치 전설의 뱀처럼 그 사람을 감싸기도 한다.

그 이야기는 그저 흘러가버리지만, 영화의 흐름이 계속되면서 그 뱀은 곧 경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괴물이 되지 말자고 했던 그 말과 다르게 경수는 끊임없이 한 여자를 쫓고 또 쫓는다. 춘천에서 만난 여자, 명숙은 그와 같은 괴물이었고 뱀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탐닉하는 정사 장면 이전에 4차선 도로를 무단횡단을 하며 건너가는 모습이 일상의 삶에서의 무단횡단이 아닌

정말 건너서는 안되는 레테의 강을 건너가는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단순히 ‘정사’라는 것보다 명숙이라는 괴물은 그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사랑해?” 그 사랑에 대한 정의는 경수도 내릴 수가 없다.

경수도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 여자에게 사랑이 아닌 괴물을 느꼈기에 그도 떠났다.

춘천을 떠나면서 나오는 길에 잠시 화면에 비추던 명숙의 사진이 그녀가 경수와 같은 괴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홍상수 감독의 의도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수의 주황색 옷은 참 오묘한 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색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공사장에서 공사장 인부의 생명을 보장하기 위한 일종의 보호색이기도 했다.

춘천을 떠나오는 경수에게 쥐어진 마지막 명숙의 사진 속 명숙도 주황색 옷을 입고 있었다.

주황색이라는 보호색 뒤편에 숨겨진 집착이라는 따스함과는 거리가 먼 욕망이 소름끼치듯 무서웠다.

춘천을 떠나오면서 경수의 선배가 잠시 언급했던 말이 있었다. “경수야, 너 사람한테 사람 이상의 것 요구하지 말래?”

그의 말에 누구나 사람에게는 괴물의 모습이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수라는 괴물을 만난 명숙이 그 괴물의 모습에 반응을 했던 것이었고.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춘천을 떠나는 경수에게 또 다른 여인이 그에게 다가온다.

흥미롭게도 홍상수 감독은 색을 많이 이용했다는 인식을 많이 받았다. 이번에는 초록색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제는 경수의 보호색을 완전히 무방비로 만들어버리는 “GO”라는 초록색 옷을 입은 선영이 등장한다.

이때 경수가 읽고 있는 책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홍상수 감독의 세심하게 꼬집어내는 스타일이라면 단순 소품 하나도 무작위로 선정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을 읽고 있는 경수의 모습은 세상과는 동떨어진 인물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이라는 그가 탐독하는 책의 저자인 스콧 니어링은 평화주의자 답게 도시보다는 시골의 삶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는 솔직하게 사회에 대해 말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와 권력을 포기하고 시골에서 일생을 살았던 인물인데,

그에 대한 자서전을 읽으며 서울로 향하고 있는 경수를 보는 것이 매우 아이러닉하다고 느꼈다.


괴물이 되지 않고자 계속해서 괴물이 되지 말자고 하는 경수에게 서울행은 결국 괴물의 삶으로 돌아가는 급행열차였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돌파구로 선영이 등장하고 결국 선영을 따라 경주에서 내린다.

경주에서 있으면서 혼자 고기와 술을 먹는 경수의 모습을 보는 경주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적대적이었다.

마치 있어서는 안되는 곳에 온 존재와도 같았다. 선영의 집을 찾아갔을 때에도 그 가족은 경수에게 이유없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선영과 우여곡절 끝에 만나지만, 선영과 그는 이미 과거의 연이 있는 인물이었다.

다만 그 선영과 하룻밤의 정사 후 떠나가는 선영이 남긴 메시지는 어디까지나

그저 누구에게나 있는 사람과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는 듯 했다.

한순간의 유희가 세상이 하나가 된 느낌이라는 것으로 괴물에게 세상과 하나되었다는 착각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괴물은 괴물이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선영과의 하룻밤에서도 경수는 끊임없이

각종 체위에 대해 언급하며 명숙의 모습을 선영에게서 찾으려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가 세상과 하나된 착각에 선영에게 먼저 사랑한다라는 말을 말한다.

우습게도 이 관계에서 경수는 스스로가 뱀이 되기를 선택한 듯 싶었다.

특히 선영이 하룻밤의 정사 후 호텔방을 나서면서 들리는 무언가가 굴러가는듯한 소리는

마치 춘천의 회전문을 다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회상시켰다.

경수와 선영이 술과 고기를 먹다가 경수의 실수로 유리잔을 깨뜨렸을 때 뒷수습을 경수가 혼자 다 하며

선영은 조심하라는 말만 육성으로 들리는 것처럼, 모든 것에 대한 뒷수습은 경수가 홀로 하고 있었다.

특히 점집에 가서 더 이상 선영에게나 경수에게나 미래가 없음에 대한 점궤는 이 인연에 대한 끝도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찌보면 경수가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감을 받아들이면서,

그 남편에게 고발의 편지를 쓰면서 다시 본연의 괴물로서의 ‘감’이 다시 살아났던 것일까.

결국 이 영화의 끝은 춘천의 회전문과 뱀의 이야기처럼,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는 와중에 선영을 떠나가는 경수의 모습을 끝으로 막이 내린다.

 

<생활의 발견>이라는 제목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은 감독의 표현법에 아플법도 하건만,

누구나 가지고 있고 결국에는 괴물은 괴물로서 남아있다라는 그 존재가 레테의 강을 건너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잊어버렸다가

다시 그 회전문 앞에 괴물로서의 ‘감’을 다시 찾는 모습은 영어 제목만큼이나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괴물’에 모습을 다시 돌이켜 볼 수 있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경수는 상실을 겪어도 그것이 아무렇지 않은 것 처럼, 욕을 내뱉고 또 다른 욕망의 해소를 향해 달려간다.

아마 서울행으로 올라가더라도 그는 끊임없이 어딘가에 또 내려서 또 다른 세상과 연결해줄 수 있는 고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토록 세상과의 ‘소통’에 목을 메는 것 처럼. 나도 뱀과 같은 존재. 내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한 나 스스로의 답은 가지고 있다.

다만 내 ‘감’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살아있고 그 ‘감’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 듯하니 계속되는 이 고리를 쉽게 끊을 수가 없을뿐.

도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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